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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r 23. 2023

서로의 시간을 여행하는 로맨스 영화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1995년에 개봉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으로 이어지는 '비포 3부작'의 첫 번째 영화입니다. 9년 간격으로 18년에 걸쳐 제작된 시리즈예요.


줄리 델피가 맡은 '셀린'이라는 캐릭터는 프랑스 파리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셀린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고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제시'라는 미국인 청년을 만납니다. 이 역할을 에단 호크가 맡았어요. 우연히 만난 둘은 기차 안 식당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제시는 다음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제시는 아쉬운 마음에 셀린에게 빈에서 함께 내려 마을을 둘러보며 얘기하자고 제안합니다. 셀린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의 데이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제시와 셀린은 꿈, 삶, 죽음, 예술, 사랑 등 매우 다채로운 주제로 진지하게 대화합니다. 고풍스러운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요. 대화와 산책이라는 키워드는 <비포 선라이즈>의 낭만성을 견인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만나서 걷고, 이야기하는 게 전부인 영화예요. 큰 갈등이 발생하는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가 아닌 두 사람의 대화를 그저 나열한 에피소드식 구성의 플롯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전체적인 형상은 입체적이고 흥미로워요. 왜냐하면 <비포 선라이즈>는 '시간성'에 천착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는 그 시간을 유려하게 포착하고 있어요.



두 사람이 빈에서 트램을 타는 장면이 그 예입니다. 이 장면에서 둘은 서로에게 한 가지씩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해 솔직하게 답하는 게임을 합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투 숏의 롱테이크로 처리하는데, 장면은 6분가량 지속됩니다. 감독은 장면을 분할하지 않고, 왜 이렇게 긴 호흡으로 찍었을까요? 그 이유는 둘 사이를 오가는 대화나 호흡, 눈빛 등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대화라는 건 기본적으로 말하고, 듣는 행위가 결합된 거잖아요. 장면을 분할할 경우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사람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감독은 제시와 셀린을 한 화면에, 오랫동안 담아냄으로써 두 사람의 교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죠. <비포 선라이즈>의 중요한 대화 장면은 대부분 이렇게 투 숏의 롱테이크로 진행됩니다. 두 사람의 대화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거죠.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술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그 시도가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셀린의 대사입니다. '신'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꿔서 읽어보면, 사랑에 대한 감독의 단상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에게 완전히 몰입하거나 접속함으로써 완성되는 행위가 아니에요. 대개의 연인 관계는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순간 깨지기 시작하거든요. 누군가를 완벽하게 사랑하거나 이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냥 그러기 위한 과정만 있을 뿐이지요. 사랑이라는 것도 나와 당신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 그 어디쯤에 존재하고 있는 감정일 겁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저리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구나, 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대화 통하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저는 그것이 가장 만나기 힘든, 이상적인 이상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가 통하려면 삶의 태도, 가치관 등 여러 가지가 맞아야 하거든요. 태도와 가치관에는 지적 수준, 식습관, 정치 성향, 취미 등 온갖 게 복합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맞지 않으면 원활한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거든요.


또 앞선 언급처럼 대화는 말하고, 듣는 행위가 전제되어 있는 건데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다는 거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의 의미가 상당히 중요한 영화고요.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공간을 여행한 게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여행한 것입니다.



<비포 선라이즈>의 ost를 소개할게요. 첫 번째 곡은 영화 초반부, 제시와 셀린이 레코드 가게의 청음실에서 함께 듣는 Kath Bloom의 <Come Here>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저를 감동시키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당신을 원한 적이 없어요. 이리 와요"라는 내용인데요. 제시와 셀린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서로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힐긋거리며 바라봅니다. 장면은 대화가 넘쳐나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두 사람의 말없는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곡은 kathy mccarty의 <Living life>인데요. 영화의 엔딩 장면에 흘러나옵니다. "이런 게 인생이에요. 모든 게 괜찮아요.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내용인데요. 오스트리아 빈에서 꿈과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제시와 셀린은 유한한 시간 앞에서 결국 헤어집니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헛헛한 마음을 대변하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3월 23일(목) 오후 10시 15분, TBN '낭만이 있는 곳에(100.5MHz)'에서 자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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