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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May 17. 2023

<미몽>의 애순과 <마녀>의 자윤

영화 <미몽> 스틸컷

1936년에 개봉한 <미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의 유성영화다. 부제는 죽음의 자장가. 양주남 감독의 데뷔작으로 가정을 버린 여성 애순(문예봉)의 비참한 최후를 그리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가 후원한 한국 최초의 교통영화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은 시골 처녀, 화류계 여성 등 주로 빈민가에서 유리걸식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미몽>의 애순은 호텔, 백화점, 극장, 미용실 등 당시 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경성의 근대 공간을 활보하며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는 감독이 페미니스트였다거나 여성을 삶의 단독자로 묘사하기 위함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몽>의 애순은 영화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 보인다.


영화 <마녀> 스틸컷

나는 박훈정의 영화 <마녀>(2018)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윤(김다미)이 애순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듀나의 말처럼 <마녀>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설정보다 "대기업의 비밀 실험으로 만들어진 초능력이 있는 아이가 탈출해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간다는 설정"이 더 중요한 영화다.


마찬가지로 <미몽>은 신여성으로서의 애순을 단죄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박현희의 논의처럼 중요한 것은 "조선 신여성 등이 아니라 새 시대의 정신에 맞추어 각성해야 할 조선인 일반"이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는 남성의 죽음보다는 여성의 죽음이 아마도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논법으로 자윤이 <마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죽이는 건 진부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죽이는 건 (아직까지는) 신선하기 때문이다. <마녀> 이전의 박훈정 영화에서 여성은 죽거나 죽은 상태로 등장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 같은 캐릭터 설정에 납득이 간다.


영화 <미몽> 스틸컷

여담으로 <미몽>에서 죽는 캐릭터는 총 두 명이다. 하나는 애순이고, 다른 하나는 애순의 딸 정희다. 차에 치여 죽은 정희는 근대의 속도 때문에 죽은 것이고, 그 차에 타고 있던 애순이 자살한 이유는 근대의 속도에 올라타 분별없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몽>에서 '진짜' 죽은 사람은 애순이 아니라 정희다.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게 아니라 그 여성들이 전부 죽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미몽>의 비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애순은 능동적으로 근대 경성의 거리를 활보한 여성이 아니라 비참한 최후를 위해(혹은 조선인의 각성을 위해) 거리로 내몰린 여성이다.


"배제와 제거는 대부분의 경우 최악의 여혐 행위"이고 "앞으로 어떻게 망가질지는 몰라도 일단 존재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게 듀나의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몽>은 문예봉이라는 당대의 스타가 여성의 욕망을 매력적으로 연기했다는 배우론으로 접근할 때 더 풍부한 논의가 나올 영화로 보인다.




참고문헌


<미몽>, <반도의 봄>의 영화 스타일 분석 / 신강호

영화 <미몽>과 1936년의 경성 / 염복규

계몽과 각성-교통영화 <미몽>- / 박현희

<마녀>, 박훈정 감독의 여성 캐릭터는 극복되었는가 / 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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