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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마모리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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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주 Apr 09. 2021

세탁기를 밀며


  우리집은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집이다. 리모델링이란 오래된 콘크리트 위에 입힌 얇은 막과 같아서 옛날 집의 문제점 몇 가지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탁실 바닥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두어 달에 한 번은 세탁기가 밀려 내려온다. 서비스센터 기사를 불러 새로 수평을 맞추고, 고무판을 사서 덧대어 봐도 소용이 없었는지 두꺼운 옷을 탈수할 때마다 세탁기는 덜커덩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다.


  오늘은 아이의 겨울 패딩을 돌렸더니 세탁기가 굉음을 내며 한 발짝 걸어나왔다. 슈퍼청소대장 엄마가 못하는 단 한 가지는 가구를 옮기는 일이다. 엄마는 온 힘을 다해 세탁기를 밀지만 세탁기는 겨우 반 걸음 물러난다. 그러면 다음 세탁 때 세탁기가 다시 한 발 밀려나오게 된다.


  누군가 보일러가 고장나서 울 때, 엄마는 튀어나온 세탁기 때문에 운다. 나홀로 육아의 고됨과 외로움은 세탁기 앞에서 터진다. 아무리 애써도 들리지 않는 세탁기 탓에 엄마는 절대로 아빠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얼굴에 드리우는 낙심을 몇 가닥 눈물로 헹군 다음, 새 얼굴을 들고 아이에게 향한다.


  "아휴, 세탁기가 또 걸어나왔네. 날씨가 너무너무 추우니까 집 안에 들어오고 싶었나부지."

  -"그건 아빠가 와야 고칠 수 있지!"


  7살이 된 아이는 이제 힘쓰는 일은 아빠가, 섬세한 일은 엄마가 더 잘한다는 걸 안다. 엄마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아이가 천천히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왔다. 아이와 둘이 워터파크에 갔을 때 다른 아빠들이 제 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면 엄마도 아이를 힘껏 위로 올렸다가 물에 풍덩 빠뜨려주었고, 놀이터에서도 한 손에 아이를 안고 다른 손에 킥보드를 들고 휘휘 걸어다녔다.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인 동시에 아빠가 되어주고 싶었다. 상냥한 엄마와 든든한 아빠 역할을 둘 다 해내고 싶었다. 바쁜 아빠를 대신해 몸놀이도 매일 해주고, 조곤조곤 정적으로 노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강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간이텐트를 짊어지고 해수욕장을 다닐 때도, 사슴벌레 유충을 찾으러 인적 드문 산을 헤칠 때도 씩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엄마는 다만 세탁기가 밀려나와서 운다. 어쩌면 세탁기는 엄마에게 그런 시간을 주기 위해 짧은 미끄럼틀을 타는 지도 모르겠다. 얼룩진 것을 씻어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 아니면 수평이 맞지 않는 세계에서 너무 무리하면 세탁기처럼 튀어나간다는 걸 깨닫게 해주려는 속셈인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입은 아빠라는 옷은 얇은 막과 같아서, 아빠인 척 하는 엄마에게는 세탁기를 밀어넣을 힘이 없다. 엄마는 그 사실이 제일로 슬프다. 엄마는 여전히 제 아이에게... 장난감 나사를 쉽게 풀 수 있는, 자전거 체인을 한 번에 감을 수 있는 아빠같은 엄마가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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