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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마모리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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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주 Apr 10. 2021

짝사랑


  4월의 어느날, 점심을 먹고 해이해진 몸으로 느적느적 오후 업무를 하고 있을 때 그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주변이 유독 밝아보였는데 그 빛은 늦봄의 햇살같이 건조한 빛도, 사무실 형광등처럼 탁한 빛도 아니여서 '아우라'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는 아우라를 발하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모니터 건너로 과장과 이야기하는 그를 조심스레 살폈다. 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도톰한 입술, 흰색 카라티에 감색 반바지, 발목 양말에 스포츠슬리퍼를 신은 모습이 귀여웠다.  업무상으로 갑의 입장에 있던 그는 거만함과 천진난만함이 섞인 태도로 과장과 수다를 떨었다.


  "ㅇㅇ 이사야."

 -"이사님 완전 제 스타일이네요."

  "그래? 싸가지 없기로 소문이 자자하다야."

  그와 안면이 있는 동료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을 뿐더러 이렇게 멋진 그를 보고도 끄떡없는 동료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은 내가 넘볼수 없을 만큼 부자였고, 외모도 준수했다. 그때까지 내가 좋아했던 남자들은 어김없이 나를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다를 것 같았다. 어느 책에서 '삶에는 선택할 기회 없이 이미 결정된 채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데 나에게 그가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가질 수 없음이 결정된 채로 나에게 다가온 존재.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외사랑이었기에 마음 상할 일도 없었다. 그는 가끔 사무실에 왔고, 올 때마다 사무실 막내인 나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중섭의 '아이들' 그림을 자리에 걸어둔 나에게 민주씨는 알고 보면 변태 아니냐 하기도 했고, 자신의 일을 돕는 두 친구와 사무실에 왔을 때만 둘 중에 어떤 타입이 좋냐고 묻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의미 없이 한 두마디 던지고 가면, 남은 하루동안 그 말을 되새겼다. 그래서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말들이 생생하다.


  나는 그기 한 말들을 쓸어담아 그가 지낼 하루를 짐작했다. 그가 타는 차와 같은 차종의 차가 지나가면 운전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깃집이 보일 때엔 회식 때 물냉면을 맛있게 먹던 그를 생각했다. 그런 생각만으로 평소에 풍경으로 대했던 많은 장소와 사람들이 내 생활 반경에 들어왔다. 그가 내 삶의 테두리를 넓혀준 거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로테를 짝사랑하는 베르테르는 자신을 대신해 온종일 로테의 곁에 있다 온 하인에게 야광석 같다는 표현을 한다. 사무실에 온 그의 아버지, 주차된 그의 까만 차, 심지어 그가 보낸 서류까지도 그와 함께 있던 것들은 야광석처럼 빛났다.

  누구도 내 마음을 눈치챌 수 없도록 조용히 혼자서 그를 생각하고 보고싶어 하는 사이 겨울이 왔다. 지금처럼 몹시 추웠던 토요일 오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가 왔다. 연락처를 교환한 적은 없지만 나는 서류에서 본 그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오늘 내 생일인데 친구 두 명이랑 고기 먹을건데 나올래요? 소고기 좋아하잖아."

 -"갈게요. 어디예요?"

  나는 들뜬 목소리로 통화를 마치고, 재빨리 준비해서 택시에 탔다. 몸에 달라붙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빨간 코트를 입었다. 술을 마시게 될까봐 구두 대신 어그부츠를 신었다. 작은 딸기 케이크를 사서 고깃집에 갔을 때 내 연락을 받고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던 그가 말했다.

  "신발 빼고 완벽하네. 신발은 내가 사줘야겠네."


  그는 케이크 촛불을 끄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내 옆자리에서 고기를 잘라 접시에 놓아주던 그를 보며, 내 마음을 드러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회사에서 오래 봐야 할 사람이기에 생각을 접었다. 밥을 다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가 껌을 사와서 껍질을 반만 벗긴 뒤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설레기도 했지만, 그가 나를 가벼운 여자로 생각한 건 이닌지 걱정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그의 친구들과도 농담을 나누며 술을 두어잔 마셨을 때 갑자기 그가 바람을 잡았다.

  "민주씨, 내 친구 어때요?"

  그는 함께 나온 자기 친구에게 소개 시켜주려고 이 자리에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의 친절에 잠시 희망을 품었던 나는 허탈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일어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는 핑계로 먼저 귀가했다.


  그 후로도 나는 그 날만을 기억에서 지운 채 마음대로 그를 상상했다. 언제쯤 그를 잊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정리되었던 것 같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는 우리 아이 또래의 아이 그리고 그 부모들의 생활만을 눈여겨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주변 환경 정도로 생각하며 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살아왔다.


  몇 주 전, 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사무실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사장님께 남길 연락처와 이름을 메모하는데 그 사람과 이름이 같았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마음에 작은 돌멩이가 떨어진 듯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그 사실이 남편과 아이에게 미안했다. 깨끗하고 완벽하게 짝사랑을 마무리한 뒤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했던 게 아닌지 과거를 반성하기도 했다.


   오늘 느지막히 일어나 아이의 귀지를 파다가 문득 생각한다. 삶에는 완전히 정리하려고 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게 있다고. 귀지를 너무 깨끗히 후벼파면 귀가 얼얼해지는 것처럼. 그래도 귀지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적당히 덮어놓는 게 나을 때가 있다고. 그때 자연스럽게 잘 넘어갔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스스로 합리화해본다. 너무 깨끗해지려고 하지 않으면 저절로 잊게 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하고 상상했던 기억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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