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과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은데?"
어떤 수업이었나?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수업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Method Madness에서 다뤘던 3가지 워크숍을 공유드린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워크숍이 더 있지만, 그중에서 글로 설명하기 쉽고, 비교적 이해가 쉬운 것들로 추렸다. 어쩌면 '핀란드식 교육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언론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봐왔던 '교육=핀란드'의 느낌을 가장 많이 느꼈던 수업이기도 하니까.
1.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그림 그리기
2. 눈을 가리고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걷기; Trust Walk Activity
3. 네 사람이 같은 이유로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기
1.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그림 그리기
방법
아주 간단했다. 교수님이 말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 각자의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
목표
목표는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와 사람들이 말을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었다. 교수님이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과정
종이와 펜을 가지고 시작한다. 교수님이 설명하면 그림을 그리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종이 한가운데에 5cm 정도의 원을 그리세요", 물론 5cm는 어림잡아 그려야 한다. "원의 오른쪽에 비슷한 크기의 정사각형을 그리고, 그 정사각형에 세모를 겹쳐서 그리세요." 이런 식의 지시사항을 4~6번 정도 수행한 뒤에 그림을 서로 비교해본다.
결과
얼핏 간단해 보이고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 같지만, 모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다. 정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그림을 그려보았다.
2. 눈을 가리고 다른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걷는 Trust Walk Activity
방법
안내자와 수행자로 두 사람씩 짝지어 진행한다. 수행자는 눈을 가린 뒤 안내자의 손을 잡고 걷는다. 일정 시간 후 역할을 바꿔서 다시 한다.
목표
남들보다 빨리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말이 어떻게 이해되며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가를 두 사람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내자는 수행자가 앞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어디서 방향을 틀어야 하고, 얼마큼 걸어야 하며, 어디쯤에 무슨 장애물이 있는지를 계속해서 알려주고 의사소통해야 한다.
과정
예를 들어, 안내자가 "오른쪽에 책상이 있다"라고 말하면, 수행자는 이 말을 자연스럽게 재해석해 "45도 한 발자국 앞에 책상이 있다"라고 이해하고 행동할 것이다. 이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통 의심의 여지없이 이뤄진다. 그런데 책상은 90도 오른쪽이나 혹은 한 뼘 앞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만약 수행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안내자는 계속해서 의사소통하며 수행자가 부딪히지 않고 걷도록 도와야 한다.
그래서 주로 "Okay, keep going..., keep going..., Stop!!! And turn left slightly."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눈을 가리고 손을 잡은 서너 짝이 강의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경험해본다.
결과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내가 수행자일 땐, 들은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마음이 편했다. 반면, 내가 안내자일 땐, 수행자가 내 말을 다르게 이해하고 움직일 때마다 어쩐지 내가 설명을 명쾌하게 하지 못했던 탓 같아서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상대방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의사소통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느꼈다. 이번엔 눈을 가린 채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걷는 것이었지만, 일상생활 속 의사소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3. 네 사람이 같은 이유로 동시에 일어나기 ★★★
방법
4명의 사람이 일렬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 때문에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야 한다. 단 조건이 있는데, 입으로 소리를 내거나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유로든 네 사람이 모두 일어나면 상황은 종료되며,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는 네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한다. 어떤 이유로든 모두가 일어난 뒤엔, 전체가 함께 토론하면서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이야기한다.
목표
말하거나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네 사람이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나야 하며,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네 사람이 그 "이유"를 파악하고 공감하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물론 성공적이었다면 지켜보던 모두가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
처음에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얼굴을 살피고 눈치를 보다가, 한 명씩 주도해서 이런저런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박수를 친다거나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일어나야 하는 이유와 타이밍을 만들려 노력하는데, 잘 공감되지 않는 이유라면 사장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2-3명만 일어나도 실패, 혼자서 일어나도 실패, 4명이 모두 일어났어도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실패다. 그러므로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상황극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 한 학생이 킁킁거리더니 얼굴을 찡그리고는 이내 코를 막고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학생들도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막는다. 그러면 반대쪽 끝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마저도 상황을 파악하고 찡그린 채 코를 막게 된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만한 이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쯤에서 처음 시작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모두가 따라 일어나고 상황은 종료된다. 이때 네 사람이 일어난 이유는 고약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가 된다.
▷ 한 번은 내가 4명에 속해 있을 때였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다리를 쓰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앉은자리에서 축구공이 있는 것처럼 발을 움직이며 공을 가지고 노는 척했다. 곧 주변 학생들이 내가 만든 상황극을 이해했고(이런 과정은 거의 순식간에 일어난다), 모두가 상황극을 파악했을 때쯤, 공을 패스하듯 다른 친구에게 넘겼다. 그렇게 서너 번 패스를 주고받은 뒤, 공이 다시 나에게 오자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세게 찼다. 축구공이 선 밖으로 넘어가면 모두가 주목한다는 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네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는 물론 공이 멀리 가버려서였다.
결과
의자에서 일어나기까지 기본적으로 2가지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 같았다. 먼저 모두가 이해할 만한 상황(Situation)을 만들고(고약한 냄새, 축구)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트리거(Trigger, 방아쇠)를 만든다(냄새 때문에 자리 피하기, 축구공을 멀리 차 버리기). 상황과 트리거라는 이 두 단계를 거쳐야만 성공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워크숍은 정말이지 무척 재밌었다. 그리고 가장 어려웠기도 했다. 네 사람이 공감할 만한 상황극을 때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릴 때도 있었다. 국적도 배경도 나이도 서로 다른 학생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상황과 트리거를 만들어내야 했던 점도 어려워지게 만드는 요인인 것 같았다.
요약하자면, Method Madness는 인지 과정과 의사소통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실험하고(Experimentation), 틀을 깨부수면서(Breaking Boundaries), 혁신적인 예술을 (Disruptive Art) 만드는 창의적인 팀워크(Creative Team Work)로 구성된 수업이었다. 이제 조금 강의가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다음은 최종 프로젝트로 했던 부끄러운 춤추기를 소개한다.
수업의 최종 프로젝트
2주간의 수업의 마지막은 팀별 프로젝트 발표가 있었다. 둘째 주부터 팀이 꾸려졌고, 나를 포함한 4명의 학생들이 한 팀이 되어 그동안 배웠던 내용을 토대로 무슨 프로젝트를 할지 이야기했다. 프로젝트는 어떤 종류라도 괜찮았고 주제를 드러낼 수만 있으면 되기에, 우리 팀은 춤을 추기로 했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왜 추는가에 있었고, 같은 팀의 한 학생이 "음악 없이 춤을 춘다면 부끄럽게 느낄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도하게 된 것이 부끄러운 춤추기였다.
우리는 춤추는 장면을 비디오로 녹화해 최종 프로젝트로 발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먼저 두 명씩 짝지어서 일반적인 춤을 추고난 뒤, 한 명씩 부끄러운 춤 추기를 하기로 했다. 수업의 둘째 주 수요일쯤, 나는 체코 친구와 짝이 되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강남스타일을 추고 비디오로 녹화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절대 내가 먼저 이거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한 명씩 강의실 한 켠으로 들어가 커튼을 치고 음악을 틀지 않은 채로 몸을 흔들었다. 우리 프로젝트의 주제가 “어떻게 하면 춤을 추며 부끄러움을(embarrassing) 느낄까?”였다지만, 나는 춤추는 동안 그다지 부끄럽거나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기에 이대로 우리 프로젝트가 괜찮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특히나 이 당시의 나는 핀란드 생활에 무척 익숙해져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가뿐한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었기에, 더욱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혹은 오늘 입은 옷이 괜찮은지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는 춤추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음악 없이 춤추는 건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게 둘째 주 금요일, 최종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마지막 수업시간이 찾아왔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 프로젝트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왜냐하면 영상을 보는 내내 무척 부끄러웠고, 더 정확하게는 내가 춤추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켜봐야 할 때 정말 부끄러웠다. 내 얼굴이 한껏 뜨끈해진 듯했다. 음악이 없어서 생기는 부끄러움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진정으로 부끄러워지는 지점이 내가 혼자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을 보는 것일 줄이야! 겉으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쩐지 다른 친구들의 춤은 그저 부드러웠는데, 내 춤은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아. 아닌가?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음, 나 너무 팔을 허둥거렸나?’라는 반성과 자기 위로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게 정말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가?
문득 찾아온 의문
나는 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배우거나 연습한 적도 없으며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앞서 밝혔듯이 이 수업은 “과제를 해오지 않아도 박수를 받는” 수업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조롱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춤을 추는 것 자체는 부끄럽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내 춤은 거의 우리네 탈춤에서 덩실덩실 만 뺀 정도였다. 나는 그 발표 시간 내내 내 꼴이 이상해 보일까 봐 걱정하며 부끄러워했지만, 내가 홀로 춤추는 영상을 보며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내 표정을 궁금해하며 뒤돌아 보지도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평가의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만약 다른 사람의 눈이나 평가를 신경 써야 하는 환경이었다면, 모두 함께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기 훨씬 전부터 부끄러웠을 것 같았다.
나는 미술대학에서, 그리고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며 다른 사람의 그림을 참고하곤 했다.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The Creative Curve)>의 저자 앨런 가넷(Allen Gannett)은 "홀로 고독하게 창의적일 수 없으며 소비와 모방이 선행되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내 경우에는 창의적이기 위해서가 아닌 '이상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참고했던 쪽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나서야 "이 과제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라고 안심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튀어 보이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비난받지도 않았지만, 덕분에 그저 그런 평범한 정도에 머물곤 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괜찮았으나, 이 방법으로는 비슷한 결과밖엔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니, 진짜 나답고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이전에 들었던 수업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오래전에 들었던 수업 하나가 생각났다. 우리 학교 미술대학 학생 모두는 전공 구분 없이 기초 조형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그중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평면조형 수업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의 과제는 ‘비전통적인 자화상 그리기’였고, 학생들은 나름대로의 다양한 방법으로 자화상을 그려왔다. 한 학생은 자신이 평생 동안 읽었던 책을 나이 순으로 나열한 그래프를 만들어서 A3용지에 프린트를 했고, 다른 학생은 일주일 동안 생겨난 쓰레기를 모아 흰 도화지에 붙였다. 또 다른 학생은 투명한 아크릴지로 정육면체를 여러 개 만들어 블록처럼 쌓은 뒤, 각 정육면체에 눈, 코, 입을 그리기도 했다. 자신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써온 학생, 자신을 모델로 종이 인형 옷 입히기를 만든 학생, 두 명이서 한 종이에 각자의 자화상을 그린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얀 도화지 위에 잉크가 말라버린 펜이나 칼, 볼펜 반대쪽 귀퉁이, 딱딱한 지우개, 자, 연필의 나무 부분으로 종이를 꾹꾹 눌러가며 그린 자화상을 가져갔다.
때는 크리틱 시간, 내 발표 차례가 되어 강의실 앞 쪽에 놓인 이젤에 내가 그린 자화상을 펼쳐 걸었다.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고 그림 설명을 막 시작하려는데, 교수님이 코멘트를 했다. “학생은 과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내가 과제의 성격을 이해 못해서 엉뚱한 작업을 해왔다는 뜻인가?’ 나는 잠깐 동안 혼란스러워하며 생각했다. 내가 혹시나 과제 내용을 잘못 들었던 건 아닌지, 지켜야 하는 규칙을 빠뜨린 건 아닌지 고민해보았지만, 교수님의 코멘트는 그저 내 작업이 과제로써 부적절하다는 말로 들렸고, 이 말은 무언가 앞 뒤가 맞지 않아보였다.
‘자화상은 이래야만 한다’라는 생각의 틀을 깨기 위해, ‘비전통적인 자화상’이라는 과제를 수행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 작업이 부적절했다면,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모아 온 학생이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써온 학생은 과연 적절한 자화상을 그린 것인가?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찰나에 교수님이 강의실 앞 쪽으로 나오더니, 내 그림을 가까이에서 살펴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더 이상의 말없이 침묵했다. 나는 설명을 마저 이어갔는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강 이렇게 설명했던 것 같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 펜이나 칼, 연필 귀퉁이로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종이 위에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는 있었지만 그림은 남지 않았습니다. 종이를 옆으로 기울여서 보면 무언가로 눌러 그린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수업이 갑자기 생각났던 이유는 그때 들었던 부정적인 코멘트 때문이었다. 그때 교수님의 코멘트로부터 내가 느꼈던 것은 무언가가 새롭고 창의적이길 바라면서도 정작 정말로 새로운 것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회’였다. 부정적인 의견은 창의성을 죽인다는 데도, 교수님은 아무런 의식 없이 부정적인 의견을 냈던 것이다(만약 그 교수님이 내 설명을 들은 뒤에 이 코멘트를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때의 교수님은 내 자화상에서 흰 도화지밖에 보지 못한 채, 빈 종이를 들고 온 나를 ‘과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학생’이라 성급하게 결론 지은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는 A+를 받았다.
춤추는 게 부끄러웠던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춤 얘기로 돌아오자. 과연 그때의 내 춤은 내가 부끄러워할 만큼 이상했을까? 자유 무용의 창시자이자 현대무용의 개척자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은 단지 무대 위를 걸어 다니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춤이라 말했다. 나의 고등학교 무용 선생님은 이사도라 던컨의 춤은 규정된 동작으로 대변되는 고전 무용에서 자유롭게 신체를 표현하는 현대 무용으로 나아간 순간이라고 했다. 더욱이 춤을 잘 못 추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도 아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유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 결국 부끄러움의 원인은 평가에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어떤 평가를 들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였을 뿐, 음악 없이 춤 춘다는 것 자체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휘청거리는 내 몸놀림을 보며 비웃거나, 내 춤이 어정쩡하다며 지적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나는 변명을 늘어놓거나 얼굴을 양손으로 가릴 필요도 없었다.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저 조용히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프로젝트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개개인의 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핀란드는 무언가 무척 다르고 또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평범해지기를 갈망하며, 또한 자신의 주변 사람들마저도 평범해지길 바란다. 그러나 이제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손해인 시대가 됐다. 독창적이라는 건 다르다는 뜻인데, 다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Why Leaders Eat Last)>의 저자 사이먼 사이넥(Simon Sinek)은 그의 저서에서 훌륭한 리더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Method Madness 수업에서 줄곧 느꼈던 것들 또한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그 안전함은 내가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동했을 때 조롱과 비난을 받지 않으리라는 기대였으며,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쌓인 신뢰였다.
수업에서는 "자신의 컴포트 존(comport zone)을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는데, 그 컴포트 존 밖으로 나가 한 번도 디디지 않았던 땅을 밟아나갈 용기 또한 신뢰에서 생겨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핀란드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사회'를 만났던 것 같다. 우리는 배움의 길에 놓여 있으니까, 어딘가 부족하거나 조금 틀리더라도 괜찮았다. 그런 면에서 Method Madness는 내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수업이었다.
우리는 배움의 길에 놓여 있으니까 (2):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핀란드 대학의 수업, Method Madness
* 이 글은 핀란드 알토대학교(Aalto Univeresity)에서 교환학생을 하면서 들었던 수업 "Method Madness: Experimentation, Breaking Boundaries, and Disruptive Art through Creative Team Work, Course"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적은 글입니다. 핀란드 교육에 관심 있는 분이나, 핀란드식 수업이 궁금하신 분이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이므로 전문적인 교육 칼럼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핀란드 대학교 수업이 어떤지 더 알고싶다면 아래의 글도 읽어보세요 :)
https://brunch.co.kr/@ssszee/31
https://brunch.co.kr/@ssszee/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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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대학 수업 이야기를 읽고 느낀 점이나,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