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다고 느끼기, 실험하기,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의 의미.
그동안 느껴왔던 것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서의 모든 것은 평가되고 있었다. 학교는 더 이상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 아닌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을 뽐내고 학원이나 과외에서 이미 배운 것을 겨루고 평가받는 곳이 되었다. 누가 누가 잘하는지 가장 중요했고,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잘 모를 땐 나서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그런데 진정으로 배우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이었어도 그랬을까?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처음 느낀 것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였지만, 당시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괜히 그런 소리하는 거 아냐?"라며 무시하기만 할 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떠날 당시, 나는 영어를 잘 못했다. 일상적인 수준의 대화는 가능했지만, 머릿속에서 문장을 만들어내느라 시간이 걸렸다. 대학 수업은 절반 정도 이해했으며,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인 내용은 설명하기 어려워했다. 핀란드에 가기 전에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라고는 프랑스어를 배우며 파리(Paris)에서 지낸 1달이 전부였고, 영어공부를 한 건 학교에서와 수능 공부, 교환학생을 위한 토플(TOEFL) 준비가 전부였다. 영어는 잘 못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하다 보면 잘하게 되리라 믿으며 교환학생을 떠났고, 교환학생을 마칠 즈음에는 원하는 걸 편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영어 실력이 되었다.
이렇게 경험을 통해 내가 몸소 깨달은 것은 배우기 위해서는 좀 못 하거나 틀리더라도 일단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수업은 틀릴 수 있는 기회, 틀려도 괜찮은 환경을 만들어 준 수업이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Aalto University의 예술디자인계열 기초 강의
이 수업은 내 평생 동안 들었던 모든 수업 중에 최고였다. 수업의 정확한 이름은 Method Madness: Experimentation, Breaking Boundaries, and Disruptive Art through Creative Team Work, Course였고, 예술&디자인 계열 학생들을 위한 기초 강의였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간 핀란드 알토대학교(Aalto University)는 다학제적인 수업을 중요시하는데, 본래 수업이란, 해당 과목의 전공생만 들을 수 있음에도 몇몇 수업은 타과 학생에게도 열려있었고 이 수업이 바로 그런 수업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디자인 전공이지만, 알토(Aalto)에서는 Business School 소속이었다. 그래서 핀란드 학교의 디자인 전공수업을 들어보고 싶어서 타과 학생들에게도 열려있는 디자인 수업을 골라 들었다.
Method Madness 수업은 워크숍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절대 평가인 Pass&Fail 방식으로 성적을 매겼다. 그리고 딱 2주 동안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헬싱키(Helsinki)의 집에서 에스뿌(Espoo) 시에 있는 오타니에미(Otaniemi) 캠퍼스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인지 체력적으로는 아주 무리가 되었고, 아침마다 당 보충을 위해 깜삐(Kamppi) 터미널 앞에 있는 K-market에서 다크 초콜릿을 사서 학교에 가곤 했었다. 수업은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고, 때에 따라(e.g. 과제가 있는 날) 오전 수업만 하고 끝나기도 했다. 대락 8명의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그중 한 명은 첫째 주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둘째 주부터 나타나기도 했다(이 자유로움을 보시라!). 이 친구는 체코에서 온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는데, 첫째 주에 출석하지 않은 대신 추가 과제를 제출하는 방법으로 학점을 받기로 했던 기억이 난다. 특이하게도 이 수업의 교수님은 두 명이었는데, 두 교수님은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듀오로 수업 중에 작업물도 소개해주기도 했다.
숙제 검사날
아마 셋째 날 수업이었던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던, 수업이 끝날 무렵이었고 학생들은 화이트보드 앞에 모여 앉아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 중 한 분이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과제였던 것 같다. 뭔가를 페이퍼 한 장에 써오라는 것이었고 내일까지 해오라고 덧붙이셨다.
다음 날, 숙제를 발표하자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앉은자리에서 발표를 했다. 이야기를 마치면, 그게 무엇이든 교수님들은 "잘했다!(Good Job!)"면서 크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솔직하게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궁색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일단 무슨 숙제를 해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정말 의지가 있었다면 모르는 부분을 다시 물어보았을 텐데, 나는 좀 안일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저는 숙제를 안 했어요."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두려움과 민망함이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숙제를 안 했으니까 박수!"라고 하면서 다른 학생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크게 박수를 쳤다.
참 이상하다.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일까? 기쁘면서도 반성이 되고, 신기하면서도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복합적인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건 나에게 긍정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교수님이 박수를 치자 나를 비롯한 교실의 모든 학생들이 함께 박수를 치며 미소 지었다. 나는 언제나 환영받고 있으며 조금은 틀려도 괜찮다는 뜻 같았다. 나는 그 교실에 있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내가 꼽은 이 수업의 3가지 장점
이 수업이 나에게 있어 최고의 수업이었던 이유는 매우 많지만, 그 대부분은 무언가 대단한 지식을 얻었거나, 포트폴리오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1. 수업에서의 모든 행동과 결과물이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안정감과 신뢰감은 어떠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비난과 조롱을 받지 않을 거라는 기대(달리 말하면, 믿음이나 예상)가 있을 때 만들어진다. 두 교수님은 학생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비난하거나 또는 다그치지 않음으로써,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서로에게 신뢰를 느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선생님이 학생의 틀린 대답을 놀리며 조롱하는 모습이 흔했던 지금까지 봐왔던 교실 풍경과 사뭇 달랐다. 그들 나름대로는 수업을 재미있게 만들어보려는 것이었을지 모르나, 그건 재밌는 게 아닌 무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Method Madness 수업에서는 나의 의견을 말할 때, 그 의견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없어도 말할 수 있었다. 부족하더라도 일단 의견을 내면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며 더 나은 것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
2. 모든 것을 직접 해보고 생각하게 하는 참여형 수업
달리 말하면, 학생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업이다. 수업에서 배우는 것들은 실제로 여러 학생들과 의사소통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인지”를 하고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몸소 배우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찰하기 위한 수업이었기에,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나의 경쟁상대이거나 혹은 내가 올라서려면 짓밟아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나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조언자이자 함께 배우는 협력자였다.
3.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매 시간 수업이 거의 끝날 무렵인 오후 4시에는 화이트보드 앞에 둘러 모여 앉아 오늘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토론하는 시간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배운 것이 의사소통이었다면, 교수님은 "좋은 의사소통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학생들은 "잘 들어주기", "대화에 집중하기" 같은 의견을 냈고, 교수님은 대답을 화이트보드에 적어서 모두와 공유했다. 두 교수님은 답을 직접 알려주는 대신 질문을 했고,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의견에 퇴짜를 놓거나 틀린 답이라며 비웃지 않았고, 학생들 또한 수업에 진지하게 임했으며, 장난치기 위해 고의로 엉뚱한 말을 하는 학생도 없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정답은 변한다는 것을 다시 되뇌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화이트보드에 적은 답에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순간들이 내게 배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더 좋았던 점을 더 꼽자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던 것
보통 교환학생들은 같은 교환학생과는 어울릴 기회는 많지만, 현지 학생들과 마주칠 일은 잘 없다. 그런데 이 수업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진행되었기에 점심시간에는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 모두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다. 드물게 핀란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른 전공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
여러 학과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앞에서 말한 체코에서 온 음악 전공생도 그중 하나였다. 그 친구는 음악을 프로듀싱과 관련있는 보다 복잡한(내가 알 수 없는) 엔지니어링 전공이라고 했다. 음악을 한다기에 무언가 악기나 작곡 전공일 거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상당시간 이어지는 수업이었기에 2주 동안은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이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급한 과제 때문에 시험공부나 프로젝트에 집중하지 못했던 경험을 생각해보니, 짧지만 압축적인 수업이 배움에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교수님
두 분 교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는 분이었다. 교수님들은 도전에 큰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계속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며 진행했던 프로젝트 Monokini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도전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끊임없는 용기를 줬고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우리는 배움의 길에 놓여 있으니까 (1):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핀란드 대학의 수업, Method Madness
* 이 글은 핀란드 알토대학교(Aalto Univeresity)에서 교확학생을 하면서 들었던 수업 Method Madness: Experimentation, Breaking Boundaries, and Disruptive Art through Creative Team Work, Course에서 배우고 느낀점을 적은 글입니다. 핀란드 교육에 관심있는 분이나, 핀란드식 수업을 들었던 경험담이 궁금하신 분이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이므로 전문적인 교육 방법을 다룬 글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 두 교수님의 작업 내용은 위키피디아 Monokini 2.0 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
*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를 더 보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서, 한 다큐멘터리 영상의 링크를 추가합니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는 부분이 와닿았던 영상인데요, 만약 ‘다름’을 나쁜것아라 여기며 무시하게 되면 ‘다름’이라는 것으로 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핀란드 대학교 수업이 어떤지 더 알고싶다면 아래의 글도 읽어보세요 :)
https://brunch.co.kr/@ssszee/33
https://brunch.co.kr/@ssszee/35
우리, 여기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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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대학 강의 이야기를 읽고 느낀 점이나,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댓글로 나눠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