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기 | 학습된 무기력감
※ 이 글은 심리상담을 받으며 쓴 기록입니다. 실제 상담 내용을 일부 편집해, 한 회기씩 연재하고 있습니다.
1회기 상담 <고도로 우울한 33세, 내 인생 첫 심리상담> 보러 가기
01 프롤로그 : 나는 내가 알코올 중독인 줄 알았다
02 2회기 주요 상담내용
03 에필로그 : 당연하다는 착각과 학습된 무기력감
04 번외 : ADHD와 자기 신뢰감
: 나는 내가 알코올 중독인 줄 알았다
내 안에 숨어있는 나도 모르는 결핍은 살면서 여러 번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 내 인생에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의 크기가 클수록 타격도 심하지만, 오히려 좋다. 삶을 파괴하고 간 만큼 내 결핍이 무엇인지, 내 역린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알코올 의존증. 알코올 사용 장애. 그 당시 나는 집에서 항상 같은 이유로 속을 썩이는 문제아이자 반항아였다. 술 먹느라 노는 게 자제가 안 돼서 늦었던 게, 엄마로부터는 '너 아주 날 골탕 먹이려고 늦게 들어오는 거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기 조절력에 문제가 있었다. 심연 깊은 곳엔 그런 마음이 있을지도 모를 거라 나 자신을 의심하는 자기 신뢰감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무튼 난 그걸 알코올 사용 장애라고 (또 한 번) 스스로 진단 내렸다. 당시 내가 만나던 사람은, 깨닫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지만, 거의 확실한 고기능성 알코올 장애였다. 매일 소주 5병을 마시고 멀쩡하게 일하러 가는 사람. 알아가던 초기엔 나도 함께 자리를 하다가 급성 알코올 중독(2.5일 동안 술을 4번 마심. 마실 때마다 두세 병정도. 내 주량은 최대가 소주 2병을 먹고 회복하려면 최소 24시간은 필요한 몸이었다.)이 올 정도였다. 낮에 회사에서 일하는데 회의시간에 말이 잘 안 나왔다. 눈에 초점이 안 맞는 것 같이 멍해지고, 눈가가 떨려왔다. 그럼에도 그때는 흐린 눈 아니 흐린 뇌를 하면서 관계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가까스로 붙잡았던 관계는 3개월도 못 가 끝이 났고, 나는 1달간의 단주 기간을 가졌다. 지난날의 무절제한 삶에 회개라도 하는 듯 자숙 기간을 가졌다. 오히려 초반의 2주는 만족스러웠다. 이때까지는 마시지 말아 보자! 하고 기간을 정해두고 술은 끊은 게 아니라서인지 아예 못 먹는다는 사실 때문에 3주 차부터 갈망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맥주가 땡기는 한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2주를 더 채우고 단주를 끝냈다. 갈망은 절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만들어냈다, 신처럼.
역시나. 자숙기간이 짧았던 탓인지, 10여 년간 쌓아온 내 습성은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 약 2-3주 만에 나는 또다시 충동적으로 무절제하게 술을 마시고 가족과 갈등을 일으켰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감각만큼은 서늘하리만치 선명해졌다. 상담센터를 두 번째로 찾았을 때 다시금 심해진 알코올 사용에 대한 나의 조절 능력 장애를 상담 제1 안건으로 선생님께 가져가게 된 것이다.
상담자 | 네 이제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어떤 얘기하고 싶으세요?
내담자 | 음.. 오늘 생각나는 건, 제가 여러 가지 말씀드렸던 것 중에 술에 관한 거요. 최근 3개월 동안 좀 심하게 제가 술을 잘 조절을 못하고 있구나를 느꼈거든요.
상담자 | 그러니까 대략 저번 달 정도부터 내가 조절을 못하고 있구나,라고 느끼신 거예요?
내담자 | 네, 올해 3월 달 정도부터 한 3개월 동안 그때 만나던 분이 있었어요. 근데 제가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 스타일이더라고요. 특히 술에 대해서요. 아예 안 먹는 사람을 만나면 아예 안 먹기도 하고 (네.)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요. 근데 가족 간에도 같이 사는 구성원으로서 집안의 룰을 지켜야 되잖아요. (네.) 부모님께서 되게 타이트하게 10시에 들어와라 이러시곤 하는데 사실 제가 지킨 적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지켜요? 초저녁에) 그렇죠. 그래서 좀 봐줘서 11시에 12시에 들어와라 이렇게 하시면은 그것도 사실 제 마음속에는 지킬 생각은 없더라고요.
상담자 | 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내담자 | 그러다가 저는 또 잔소리할 거니까 무조건적으로 연락을 안 받고 하는 게 습관이 됐거든요. 그러다 가끔은 새벽 늦게 다들 잘 때 연락해 놓고 외박하기도 했어요.
상담자 | 그러시군요. 혹시 형제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다른 형제한테도 그렇게 하세요?
내담자 | 언니랑 남동생이 있는데, 저처럼 술먹거나 안 들어오거나 않았기 때문에 거의 안 그러긴 해요. 그러다 보니 저한테 보다는 더 허용적이시긴 해요.
상담자 | 차원 씨랑은 다른 성향이셨군요, 다들.
내담자 | 네, 근데 이번에 제가 깨달은 게 제가 지나온 10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다 안 좋았다 했던 시기들을 되짚어보니까 술에 대한 문제들이 항상 같이 있었더라고요. 가정에 불화가 있을 때는 제가 항상 술을 먹는 친구들이랑 다니면서 늦게 들어오고 연락은 또 안 되고. 그러니까 연락이 안 돼서 문제다 하면은 연락을 미리 하든지 아니면 일찍 들어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서 해결을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계속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살고 있는데 엄마랑 한 달째 말도 안 했었거든요 최근까지만 해도..
상담자 | 그러셨군요. 한 달 동안 안 하셨다니, 힘드셨겠어요.
내담자 | 항상 같은 반복이더라고요. 이게 너무 익숙해져서 저는 또 늦어버리고 외박해 버리고 사과하고 반복했었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죄송하기는 하지만 못 지킬 약속은 더는 못 하겠다. 좀 나를 풀어주시면 안 되겠냐고 진지하게 부모님과 얘기를 하게 됐긴 해요. 근데 문제는 최근 3개월 동안 오늘은 집에 일찍 가야지, 외박 안 해야지, 아니면 오늘은 적당히 한 병만 마셔야지, 이게 전혀 안되더라고요. 제가 찾아보니까 술을 무조건 많이 먹는 게 중독이 아니라 어느 정도만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선 실패하고 조절이 안되는 걸 의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그래서 그거에 대한 제 자신에 대한 충격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러셨어요.) 네 오늘은 집에 좀 일찍 가야겠다 왜냐하면 저도 몸이 힘드니까. 근데 그게 안 되는 거를 매번 느껴서 결국에 그 사람을 끊어내게 되긴 했는데
상담자 | 그럼 제가 좀 의존이랑 조금 다른 느낌이 들어서 좀 여쭤볼게요. 술에 의존하는 분들은 상대방이 누구와 관련 없이 술이거든요. 상대방이 변수로 작용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어떤 대상을 만나면 그분이 술을 좀 드시면 나도 술을 먹게 되고 어떤 술을 안 드시는 분을 만나면 술을 안 먹게 되고 이러신다는 거잖아요. 말씀하신 최근에 만나셨던 분이 썸을 타거나 사귀고 싶거나 하는 마음이 드는 분이라는 얘기잖아요. (네.) 그분이랑 술을 마시게 됐을 때 예를 한번 들어주시겠어요? 어디에 가서, 어떻게 술을 마셨고, 어떤 얘기를 했고, 그때 느낌은 어땠고, 그런 것들을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내담자 | 그분이랑은 운동하는 모임에서 알게 된 분인데, 처음엔 어떤 사람인지 모르다가 따로 만나서 술도 한 잔 하다가 사귀게 됐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이 술을 엄청 많이 드시는 분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술자리나 마시는 양 같은 게 기준이 완전히 달랐어요. 만나면 항상 술을 마시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만나면은 각자 술을 6~7병씩 먹는 거예요. 인당. 폐급으로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는데, 그냥 체질이 그런 사람인 거죠. 근데 제 성격 상, 앞사람을 자꾸 따라가려고 하거든요. 그 사람이 이제 나를 제지하지 않으면 더더욱이요.
상담자 | 그래요. 우선 우리 상상 한번 해볼게요. 그분이 술을 열심히 드시고 있어요. 차원 씨한테도 '술 드세요?' 이렇게 물어보는데 차원 씨가 '저는 술 좀 조금만 마시려고요.' 하면서 거절을 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상상 한번 해보실래요? 어떤 마음이 드는지.
내담자 | 그러면은.. 음. 그때 당시에 그게 참 안 되긴 했어요.
상담자 | 네, 그러니까 안 된 이유를 좀 찾고 싶어서요.
내담자 | 뭔가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그 사람을 거절하는 게 돼버리면 그 사람한테 실망을 줄까 봐였어요.
그래서 저는 나도 술을 좋아하긴 하니까 약간 이런 식으로 합리화했던 것 같아요.
상담자 | 내가 술을 거절하면 그 사람한테 실망을 주고 자존심이 너무 상하니까 사람은 보통 그래 나 술 좋아하지, 하고 이렇게 합리화를 많이들 하는 편이거든요. 거절하면 그 사람한테 실망을 줄까 봐, 그게 두려웠네요. (네.)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실망을 주면 그다음에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내담자 | 그러면 이제 헤어지는 것까지 그냥 이제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이별이 무섭다기보다는, 어떤 갈등 요소 자체가 생기는 걸 회피했던 것 같아요.
상담자 | 그러니까 실망을 주면 이별은 그냥 하면 되는데, 갈등이 생기는 게 두려우셨다는 거네요.
내담자 | 맞아요. 그리고 뭔가 이별 자체가 실패의 느낌이랑 연결이 돼서 그 당시에 제가 좀 짧게 연애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실패를 했다,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상담자 | 짧게 연애를 많이 하게 되는 분들은 '내가 문제가 있나?' 하면서 연애가 끝나는 걸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정말 실패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커요. (네.) 힘들었겠네요.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결국은 거절을 못하고 술을 드시게 된 거잖아요.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갈등이 생기면 실패를 하게 되니까. 이게 어디서부터 유래됐다고 생각하세요? 특징이 뭐냐면 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날 실망할 거고, 실망을 하면 나와의 갈등이 생길 거고 갈등이 생기면 너무 불편한 상황이 돼요. (네.) 혹시 어디서부터 시작됐어요?
내담자 | 그.. 표현을 못하는 것 같거든요. 제가 드러내는 거를 못하는.
상담자 | 표현을 못하면 우리가 표현을 할 수 있는 게 '참는' 게 하나 있어요. 그 이분이 '술 드세요~' 했다 하면, 차원 씨가 한번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시겠어요?
내담자 | 그냥 안 친하고 아는 사이였을 때는 아 저 그렇게 술 안 좋아하고 잘 마시지도 못한다 이렇게 말하고 적당히 거절하기도 했었거든요.
상담자 | 그렇죠. 그건 안 친하고 친해질 갈등이 생겨도 별로 없고 상관없으니까. (네.) 근데 갈등이 생기면 곤란한 경우가 아주 친밀한 관계잖아요. (네.) 남자친구나 가족이나 친한 친구나.
내담자 | 네. 초반에 근데 그냥 휩쓸리는 게 좀 성격상 있다 보니까, 처음에는 표현을 했어도 상대방은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간 거예요. 억지로 먹인 건 아니었거든요. 저도 분위기를 지키려다 보니 처음에 마음먹은 것보다 항상 더 많이 먹게 되더라고요. 원래 저 스스로랑이든 타인이랑이든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고, 주변에서 그런 평가를 많이 듣기도 하거든요. 제가 아버지랑 같이 최근에 달리기를 같이 하는데 그럴 때도..
상담자 | 네. 잠시 스토리가 다른 걸로 넘어가서 제가 잠깐 이것만 정리하고 달리기 얘기 좀 들어볼게요. 엄마와의 갈등을 말씀을 하시는데 이게 너무나 똑같은 거예요. 술 많이 드신다는 전에 만난 분과도 엄마와도요.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갈등이 생기고 한 달 동안 말도 안 하고 너무나 괴롭잖아요. 통제하려는 분들은 자신의 말을 따라야 되고 통제를 하기 위해서 압박을 가하고 좀 그런 스타일이 되거든요. 엄마의 관계에서 엄마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나잖아요. (네.) 엄마가 실망하고 갈등이 생기고. 이게 너무 싫으니까 그 말을 들어주게 됐다가 또 안 들어주게 되고 이러잖아요. 전에 만났던 분과도 그분의 요구 '술 드실래요?' 이거를 들어주지 않으면 이 분이 실망할 거고 또 갈등이 생길 거고 갈등이 생기면 마음이 안 좋아지니까 내가 원하지 않는 이별이 될 수도 있네,라고 생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거절하기 어렵죠. 진짜 술을 거절하기 어려워져요. 왜냐하면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상담자 | 그러니까 이거는 의지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리적인 문제예요. 제 얘기가 어떻게 들리세요?
내담자 | 네.. 맞는, 이게 대인관계에서도 발현이 됐던 것 같아요.
상담자 | 그렇죠. 네 제가 아까 말 끊었던 얘기 듣고 대인관계에서 발현된 거로 한번 더 넘어가 볼게요. 아빠랑 달리기를 하기로 했어요. 근데 어떻게 됐어요?
내담자 | 아 네, 아빠는 운동을 아침 일찍 하시거든요. 그래서 저도 아침 일찍 하면은 뭐든지 좋다는 게 이런 게 약간 절대 조건처럼 깔려 있긴 해요. 인생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상담자 | 부엉이한테 아침에 운동하는 게 좋다고 하면 부엉이가 잘하나요? (아뇨.) 그렇죠. 같은 거거든요.
내담자 | 근데 아빠의 스타일이 약간 그런 편이시거든요. 누구든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으로서 있잖아요. 예를 들면 아빠는 설렁탕 같은 거 먹으러 갔을 때 짠 건 몸에 안 좋으니 소금 넣는 거 싫어하시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 좋다. 그래서 아침에 달리기를 하자고 하시는 거죠. 그러면 어쨌든 저도 오케이 하고 하기로 한 거니까 지키려고 하죠. 근데 저도 전날에 일찍 들어가는 노력하고 이런 게 있어야 되는데 저는 약간 과신형 스타일이어서 오늘 저녁 약속도 갔다가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야지 하다가 결국은 약속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게 되면서 아침에 또다시 아빠랑 약속했던 거를 지키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상담자 | 그래요. 이거 하나 좀 여쭤볼게요. 아침에 조깅하자는 제안은 차원 씨가 하셨어요, 아버지가 하셨어요?
내담자 | 보통 아버지가 먼저 하세요.
상담자 | 아버지 스타일에 맞춰서 차원 씨 스타일을 맞춰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이거 어려운 문제거든요. 보통 자녀는 아버지의 스타일을 조금 알고, 부모는 자녀의 스타일을 많이 알아요. 왜냐하면 계속 키웠으니까. 그러면 제 스타일이랑 너무 다르잖아요. 저희도 큰 애랑 작은 애가 있는데 둘이 스타일이 너무 달라요. 큰 애는 이거 하면 작은 애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런 게 있어요. (네.) 작은 애가 올빼미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어려워하는데. 그러면 부모가 맞출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저녁에 조깅할래? 이렇게 아침에 하는 게 좋아도 본인이 맞춰줄 수 있지만 그게 아니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아, 그러니까 네가 맞춰라는 게 기본값으로 되어 있는 걸로 보여요. (그렇죠.)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내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고. 내가 개조되거나 교도소에서 교정받는 느낌을 받거든요. (네.) 기분이 매우 안 좋죠. 하자는 대로 못 하면 실패하고 힘들고 자기 신뢰감이 낮아지게 되거든요.
내담자 | 저는 막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상담자 | 어떻게 보면 그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생각을 하면 부모랑 갈등이 얼마나 심해져요. (네.) 그리고 다른 문화를 알지 못하잖아요. (어떤 거요?) '부모님이 이거 나한테 맞춰야 되는 거 아니야' 이런 경험을 아예 해보지 않았던 거죠. 내가 부모한테 맞추는 게 당연한 건데, 이렇게 돼버리잖아요. (네, 네 맞아요.) 그렇죠. 그런 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렇게 되는 거죠. 만약 제가 차원 씨한테 차원 씨 남자 같아요, 남자처럼 사세요. 이러면, 그게 편하게 편안하게 잘 되나요? (아니죠.) 예. 안 돼요. 절대 안 되죠. 이유도 모르겠고 나는 나인지도 모르겠고 왜 내가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돼버리거든요.
지금 삶의 주인이나 주어가 내가 아니고 계속 이렇게 옆사람들이 치고 들어와요. 그러니까 내 차인데 운전사가 차원 씨가 아니고 아빠가 됐다가 엄마가 됐다가 그러면 그냥 끌려가는 거잖아요. 끌려가는 게 뭐가 재밌겠어요? (맞아요.) 남자친구랑 여행을 가는데 난 이번에 바다 가고 싶어. 근데 남자친구가 산 가고 싶어 막 이래요. 바다 가야 재밌지 산 가면 재미없잖아요. 이번에는 바다 가고 다음에는 산 가는 건 괜찮지만요. 그런 거거든요.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려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지금.
내담자 | 네..
상담자 | 잘못했다고 딱, 낙인 받고. 자꾸 교정받으려고 하고. 그래서 진짜 힘들었겠네요. 지금 어떤 마음이세요?
내담자 | 근데 이제 최근에 막..
상담자 | 음, 방금 어떤 마음이신지 잠깐 들어봐도 될까요? 표정도 변하시고 마음에서 무엇이 느껴지신 것 같아요.
상담자 | 천천히, 지금은 이제 눈물을 흘리는 게 훨씬 차원 씨한테 필요한 시간 같아요. 눈물 좀 흘리시고 자신의 마음을 들어주시고. 함께 있어주세요, 자신의 마음에. 굳이 뭘 하지 않아도 돼요. 자신과 함께 있으세요.
상담자 | 편안하게 함께 있으세요.
내담자 | 할 수 있을까 막 이런 생각이 들어요.
상담자 | 그래요. 방금 어떤 마음이 드셨어요?
내담자 | 뭐가 탁 풀린 기분이긴 한데
상담자 | 그런 느낌이군요, 탁 풀린 느낌.
내담자 | 뭔가 가둬진.. 되게 제한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내 생각이 만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담자 | 그래요. 내 생각이 만든 거였다. 잠깐만요. 이 표현 좀 사실에 가깝게 바꿔볼게요. 내 생각이 만든 거였다, 도 맞을 수 있어요. 근데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내 경험이 만든 거다라는 게 좀 더 정확해요. 두 개가 어떻게 들리세요?
내담자 | 경험은 좀 과거에 일어나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 생각은 좀 앞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그런 느낌.
상담자 | 앞으로 바뀌고 싶은 마음이 크네요. 이 두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냐면 내 생각이 맞는 거였다, 그러면 책임이 다 나에게 있어요. 내 경험이 맞는 거였다, 그러면 다 내 책임은 아니에요. 나에게 경험을 제공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경험을 하게 되잖아요. 다 내 책임은 아니에요. 나와 환경이 함께 만들어가는 복합물이기 때문에 다른 경험을 하면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죠. (네.) 그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또 어떤 차이가 있냐면, 내 생각이 만들었다 그러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돼요. 근데 내 경험이 만든 거다, 하면 약간 수동적인, 피동적인 면이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통제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나요. 그래서 내 생각이 만들었다,라고 해서 통제하고 싶은 마음, 내가 책임을 져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요.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통제를 해야 된다고 여기시는 것 같아요. 진짜 많이 바뀌고 싶으시네요. 그 간절함이 저한테 와닿아요. 어떻게 바뀌고 싶으세요?
내담자 | 제가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가능성이나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상담자 | 그렇죠, 예. 못하고 계셨죠? 못한 이유도 혹시 이해하셨어요?
내담자 | 이유는.. 이제 그냥 너무 그게 당연해서?
상담자 | 이유가 이거거든요. 엄마 아빠가 말하는 게 맞고 내가 생각하는 게 틀려. 틀린 내 생각을 따라가기가 어렵잖아요. (네.) 그러니까 엄마 아빠 생각을 계속 따라가게 되죠. 근데 그렇게 길들여졌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 생각은 틀리고, 12시에 들어오면 안 되고, 1시에 들어가면 안 되고, 10시에 들어가야 되고. 너 그러면 안 되고, 아침 일찍 운동해야 되고, 너 하는 거 지금 다 틀렸어. 부모 말을 따라야 돼,라고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으면 그렇게 되죠. 학습된 무기력감이라고 해요. 학습된 무가치감.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좀 느끼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네요. 그래요. 어떻게 바뀌고 싶으세요?
내담자 | 음..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들이 되게 많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상담자 | 그렇죠. 인지조차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게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담자 | 제가 개인적으로는 되게 '가능성'이란 것을 많이 따지거든요. 그러니까 여지를 두는 거죠. 어떤 한 가지 선택에 대해서 100가지의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되게 어떻게 보면은 우유부단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열려 있을 수도 있어요. 강박이기도 하거든요. 어떤, 단 하나의 선택의 범위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한번 다 펼쳐보고 다 따져보고, 근데 이게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요되다 보니까 좋은 것도 아니더라고요. 빨리 선택하고 결정한 방향으로 가는 게 좋으니까요. 근데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으로서 제가 인지를 못하고 있던 것들이 발견되면 너무 당황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더 놀라기도 하면서 어떻게 다뤄야 될지 모르는 상황인 거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저녁에 운동을 해요. 그러면 아빠는 밤늦게 운동한다고 지적을 하게 되는 거죠. 아빠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니까, 이제 일찍 나가서 일하셔야 되니까. 저녁에 아빠는 일찍 주무시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아침에 운동하자는 걸 거절한다.
상담자 | 그쵸.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 음식 뭐 좋아하세요?
내담자 | 저요? 양꼬치요.
상담자 | 싫어하시는 건 뭐예요?
내담자 | 홍어요.
상담자 | 그러면 야 홍어 먹으라고 계속 주면 어떨까요.
내담자 | 못 먹죠.
상담자 | 네 이상하지 않죠. 네 차원 씨 생일날 야 홍어 좋아하니까 홍어 먹자 하고 홍어집 가면 그게 생일상은 아니죠. 그러니까 내 딸이 양꼬치 좋아하잖아 양꼬치 사주고 양꼬치 보면 차원이 생각나고 이런 게 아버지잖아요. 같거든요. 자기가 홍어 좋아한다고 딸한테 홍어 주는 게 아니고 양꼬치 주는 거예요. 삶의 방식이나 삶의 시선도 마찬가지거든요. 근데 이게 안 될 때가 있어요. 애가 어릴 때.
내담자 | 근데 제가 저항심이 강한 애다 보니까 집 안에서도 어리게 보는 것 같아요, 아직.
상담자 | 다행이에요. 왜냐면 그 저항심 있어서 왜냐하면 그 저항심 없으면요. 우울증 걸리거든요. 저항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나마 버틴 거예요. 자기를 지켜준 거예요. 그 저항심이.
내담자 | 아, 그런가요?
상담자 | 네. 누가 길거리에서 끌고 가려고 해요. 저항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내담자 | 큰일 나죠.
상담자 | 그렇죠.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되잖아요. 예 지금 그거 안 하시려고 저항하신 거거든요. 저항한 게 자기를 살린 거예요. 근데 그걸 이제 반항이라고 부모가 인식하는 게 이게 문제죠. 부모님들도 맞지 않게 하신 부분들이 있는데.
내담자 | 근데 이제 저항을 한번 하고 나면 저도 많이 불편해지더라고요.
상담자 | 그럼요. 불편해지죠. 부모님한테 사이좋게 지내고 싶지 갈등하면서 지내고 싶은 사람이 뭐가 있겠어요? 근데 부모님이 차원 씨를 조금 어린아이 다루듯 하세요. 30대도 아니고 마치 10대도 아니고 10살 이전에 그런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전에 상담했던 분 중에 사례를 들어볼게요. 그분의 엄마도 심하게 단속을 하셨어요. 여자분이었는데 10시 전에 안 오면 혼나고. 근데 한참 얘기하다 보니까 엄마가 혼전 임신을 하셨어요. 당시 남편이랑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결혼을 하게 된 거예요. 딸이 자기와 같은 인생을 살까 봐 너무 겁나니까 그런 얘기를 하면서 딸이 엄마를 이해하면서 미움이 좀 줄어들었고 적절하게 거절하게도 됐고 그전에는 반항만 했는데 얘기를 하고 나서 변화가 생겼었거든요. 그것처럼 엄마도 불안이 되게 높으신 분이에요. 근데 왜 불안이 높은지는 모르겠는데 불안이 되게 높으시네요. 근데 그 불안을 차원 씨가 지금 닮으신 것 같아요. 영향을 받으셨거나 닮으신 것 같아요.
내담자 | 지금 생각나는 건 어릴 때부터 이성교제나 성적인 주제들에 대해 되게 금기시했던 게 떠올라요. 중학교 때 이성 친구한테 '반에서는 스킨십을 자제하자'라는 문자를 들켜서 혼나고 헤어지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정말로 손만 잡았었는데 오해가 생겼었던 것 같아요. 말은 했지만 믿진 못하시고. 저희 언니도 성인 되자마자 만난 분이랑 십 수년 사귀고 결혼했는데 여행 허락을 7년인가 지나서야 정식으로 받았거든요.
상담자 | 그런 자연스러운 것들이 금기가 되면 죄책감이 일어나고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거든요. 제가 청소년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했는데 애들이 요즘 손 잡는 거 이상의 연애를 하는 것들을 많이 봤었어요. 참 어려웠던 부분이었겠어요. 오늘은 시간이 다 돼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상담은 좀 어떠셨어요?
내담자 | 네 제가 좀 억눌려 있는 것들을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것 같아요.
상담자 | 그래요. 저는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게 너무 열심히 잘 살아오셨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너무 저항 잘했고. 저항을 했기 때문에 ADHD 약 먹고 만나지, 저항 안 했으면 우울증 약 먹고 만나야 했어야 될 상태였어요. 지금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시는 거 지각 안 하고 계시는 거 정말 감명이 깊었어요.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고 너무 잘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고 그래요. 그리고 오늘 제가 상담하면서 느낀 바 하나는 제가 지난 시간에도 좀 그랬는데 ADHD의 스펙트럼이 좀 있는데 진짜 전형적인 ADHD가 있어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요. 근데 HSP라고 혹시 아세요?
내담자 | 네, 초민감자.
상담자 | 네, 초민감자 쪽에 가까운 ADHD 증상을 보이는 분들이 있는데 지금 제가 지난번 이번 상담하면서 느낀 바로는 HSP 쪽에 가까운 ADHD가 있는 분이에요. 정서에 민감하고 자기를 잘 알고, 그러니까 센서는 민감한데 센서를 받쳐줄 만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가 지금 갖춰지지 않은 상태. 그런 상태로 좀 보였어요. HSP 아시는 게 좀 반가웠고요. 제 얘기 어떻게 들리셨어요?
내담자 | 그 개념을 알게 되고는 저도 그거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거든요. 그럼 제가 전형적인 그런 모습은 안보이신다는 건가요.
상담자 | 전형적인 ADHD는 이렇지 않아요. 이런 모습 없어요. 진짜 전형적으로 나타나요. 감정 잘 못 느끼고요. ADHD는 감정을 못 느끼기 때문에 바로 행동하게 되거든요. 근데 감정이 너무 민감해서 억압되면 완충 작용을 하는데, 완충 작용을 못하고 이렇게 행동하게 돼요.
내담자 | MMPI 검사를 어제 했거든요.
상담자 | 어제 하셨어요. 이게 단체 검사라서 기간이 있어서 센터에서 모아서 넘어오면 제가 그때 설명해 드릴게요.
내담자 | 네, 근데 그게 무슨 검사인지, 그 질문지들을 하다 보니까 되게 신기한 질문이 많아서요.
상담자 | 그게 다면성 인성 검사라고요. 현재 전 세계에서 정신과 병원과 상담센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신뢰성 있는 검사예요.
내담자 | 제일 인상 깊었던 게, "절대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런 것들을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인 거잖아요.
상담자 | 그렇죠. 근데 거기에 뭐랄까, 킬러 문항 같은 것들도 숨어있어요. 이 문항은 조현병 있는 사람들만 답하더라, 이런 문항들도 있고 그래서 생뚱맞게 나는 기계에 대한 잡지를 좋아한다 뭐야 이게 뭔 상관이 있어 그런데 그런 것들이 좀 관련이 좀 있거든요. 똑똑한 사람들이 만든 거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고 잘 쓰고 유용한 검사인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안 하다가 처음으로 지원해 준다고 해서 소개도 하고 권해드리기도 하게 됐어요. 결과가 나오는 대로 설명해 드릴게요. 오늘 반가웠어요.
내담자 | 감사했습니다.
상담자 | 잘 지내세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지금 사춘기를 한 지금 20년째 겪고 계세요. 부모님이 포기를 안 하셔가지고.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심리적 사춘기.
내담자 | 네, 감사합니다.
: 당연하다는 착각과 학습된 무기력감
이번 상담에서도 수많은 의미 있는 말들이 오갔지만, 압도적인 문장은 이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면 너무 고통스러운 상태예요, 지금"
착한 아이 증후군, 거절을 잘 못해서,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무의식 속 강박이 있었다. 거절하고 나면 남는 불안과 불유쾌한 감정이 너무도 오래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그냥 해줄 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반복 재생된다. 이렇게 고통스럽느니 차라리 내가 좀 불편하고 말자. 그래도 어떻게 보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후에 따라붙는 각종 자기 합리화까지. 환상의 사고방식이었다. 환장할 사고방식이었다. 겉으로는 쿨해보이고 성격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내면은 누구보다 갈등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누군가와 의견이 안 맞아 대립하고 다투게 된다는 건 진돗개 하나에 준하는 비상사태였다. 그럴 조짐이 보일 때부터 두근거림 같은 신체적 증상이 곧장 나타나곤 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대체로 ‘개선해야 할 대상’인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려면 너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용기가 없었던 것도 맞지만, 더 심각한 건 용기를 내야 한다는 인지조차 못했던 것이다. 상대방이 술 먹자고 한 걸 거절하고 다른 것을 하자고 할 용기. 나의 마음속 안에는 그럴 용기는커녕 ‘당연히 상대방은 술 좋아하니까 먹자고 한 거지 뭐’ 하는 무기력한 당연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착각이었다. 성격이 별난 데가 있어서 가족들 사이에서도 별종이라고 불리고 어디서든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는 편이라 내가 생각한 당연함이 잘못된 것일 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어리석음이고 오만이자, 대단한 착각이었다.
부모님과의 에피소드, 전에 만나던 분과의 에피소드. 연결고리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의 감각을 믿을 생각을 못했다. 학습된 무기력감/무가치감. 예전부터 심리학 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던 개념이고 어느 정도 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어느새 잊게 된 단어를 들었다. 나처럼 세상에 당연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혹시 어느새 학습된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P.S. 질문 앞에서 말 돌리는 내 모습
심리 상담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상담이 오가는 중간중간에 내 감정을 물어보는 것이 참 낯설었다. 평소엔 말 많은 나지만 말문이 막혔고 비어버린 오디오 또한 낯설어서 다른 이야기로 이어가기를 자주 시도했다. 그럴 때마다 날카롭게 다른 길로 빠지는 나를 건져 올려서 다시 내가 뱉어놓은 말들, 감정들 앞에 갖다 놓으셨다. 말투의 부드러움 때문인지 불쾌하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발가벗겨진 듯 괴로웠을 뿐이었다. 어떻게 들리세요. 그때 어떠셨어요. 끝까지 파고들어 버리니 피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깨달은 것은, 내가 마주하기 벅찼던 것들은 자동적으로 회피해 왔다는 것이다.
30 중반까지 살아내니 ―오만한 걸 알지만―모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생각이긴. 당연히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 모양이지. 내가 만든 세상에 갇혀있다가 그 세상이 부서진 기분이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는데, 내 알의 표면은 특수강판이었나. 끊임없이 나를 믿지 못하는 자기 불신이 덧씌워진 특수강판. 안에서 부수지 못한다면 밖에서라도. 선생님의 물음들은 내게 데미안의 말이었다. 종국에는 모순을 견디는 싱클레어처럼, 투쟁에 성공할 수 있을까? 반 평생 의지하던 기둥을 베어 버릴 수 있을까?
결국 이번 상담 후반에 선생님이 두 번이나 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바뀌고 싶으세요?'
갈등은 실패라고 생각하고,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지켜내지도 못하면서 실패까지 반복되었을 때, 앞으로는 감당 가능할 만큼만 슬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들이 많았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하려는 게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바뀌고 싶다.
: ADHD와 '자기 신뢰감'
상담 중반에는 평일 퇴근 후로 시간을 바꿨지만, 초반에는 상담 시간이 주말 오전 11시였다. 나는 모든 약속에 자주 늦곤 하는 사람이었다. 지각비를 내야 하는 약속이면 지각비를 냈고, 친구와의 약속에는 늦어서 커피라도 사기 일쑤였다. 결심하고 끊은 여행길의 KTX 기차 시간에도 늦어서 수수료를 무는 것도 일상이었다.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지만 회사마저도 그해 지각 No.1을 찍어서 시말서 쓰고 따로 면담한 적도 있다. 그러나 상담만큼은 늦지 않고 싶었다. 생각보다 상담의 효능이 대단했던 건지, 실제로 늦은 적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디폴트 상태는 '늦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과 '결국 또 늦어버리고 나서 치솟는 자책감'에 매일 매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살아내고 있던 건 여전했다. 그런 내게 2회기였던 오늘 정각 즈음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내담자 | 안녕하세요.
상담자 |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두 번째인데 안 늦고 잘 오시네요.
내담자 | 아.. 네, 제가 개인적으로 이제 좀 약간 다짐했던 그 시간에는 좀 못 미치지만 그래요.
상담자 | 아 그런 거를 좀 체크하시나요?
내담자 | 네 좀 어디든지 늦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요.
상담자 | 고생 많으세요. 진짜 수고 많아요. 이게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는데, 그러니까 분명히 보통 ADHD 있고 그러면 자주 늦으시거나 깜빡하시거나 해서 내가 문자 드려야 되나 이렇게 고민을 항상 하는데 늦지 않고 오셔가지고 제가 놀랐어요. 진짜 노력 많이 하시네요.
내담자 | 진짜 좀 약간 기본이긴 한데 그래서 지키고 싶더라고요.
상담자 | 그 특징 중에 하나가 ADHD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자꾸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가요.) 네, 안 늦고 이러는 거를.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거 기본이야 막 이렇게 얘기해서 이렇게 돼버리시는데 기본이 아니에요. 지금 너무 애쓰고 계시는 거예요.
내담자 | 근데 이제 뭐 특히 집에서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상담자 | 그쵸 집에서 많이 받죠.
내담자 | 네 집에 저 같은 사람이 없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특히 아빠가 어디든 15분 전! 이러시면서 그런 걸 많이 얘기하셔서.
상담자 | 그러게요. 아시겠네요. 15분 전에 도착해야지. 그러면 20분 늦지 않으세요? (웃음) (그쵸.) 네 진짜 노력 많이 하셔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내담자 | 제가 일정 중에도 까먹는 일들이 있긴 해요. 특히 저번 주에는 회사에서 결산 보고를 분기 별로 하는데 20분을 일찍 오라고 했거든요. 그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거를 완전히 까먹은 거예요. (그래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충격과 공포였어요.
상담자 | 나 자신을 못 믿게 되면 스스로에게 충격받게 되죠. 제가 두 번째 뵀는데 이런 예시를 드는 게 조금 조심스럽기는 한데, 여기 내담자로 오시는 분들 중에 지하철에서 성추행이 있었던 것 같은데 특별하게 모르겠고 근데 난 당한 것도 같은 기분은 안 좋고, 이게 뭐지, 하는 느낌이 들으셨대요. 순간적으로 성추행인지 아닌지 몰랐다라고 하시더라구요. 근데 지하철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일어나거든요. 당장 말로 대응하지 못하시더라도 째려보기라도, 아예 뭔지 몰라서 가만히 있기보다는 그렇게 해보시기를 말씀드렸거든요. 자신의 느낌을 믿으시라고 했어요.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혐오감, 자기의 느낌을 믿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증이 바로 올 수 있거든요. 진짜 충격이었겠어요. 본 지 얼마 안 됐는데 예시가 좀 세서 죄송해요.
내담자 | 아니에요.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서.
상담자 | 자신에 대한 신뢰감은 되게 중요한 부분이고요. 우리가 두 살짜리가 뭐 하면 아이고 잘했어 고마워하고 그러잖아요. 그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수고했다 고맙다,라고 하는 게 좋아요. 너 기본인데 왜 안 해 왜 못해 이러기보다는요. 많이 애쓰고 계시잖아요.
내담자 | 이게 참 모두 잘하는 게 난 안 될까 이러면서 이렇게 되는 것 같긴 해요.
상담자 | 잘하는 분야가 각자 있죠. 잘하는 분야. 저는 반복하는 일을 못해요. 제가 알바 할 때 죽는 줄 알았어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힘들고. 고문받는 느낌? 그래서 뭔가가 바뀌고 프로젝트가 새롭게 생기고 막 이래야지, 같은 일을 똑같이 하면 (맞아요.) 너무 쉬워도 재미없죠.
내담자 | 너무 그렇죠.
상담자 | 자기에게 자극이 되고 재밌어야 잘 되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전 그게 공부예요. 공부요. 심리학, 상담학. 다른 거 말고 사람의 뇌에 관련된 마음과 관련된 분야만요. 벗어나면 재미없어요. 제가 상담하기 전에 건설회사 다녔었는데 나름대로 잘했거든요. 재미는 별로 없었어요. 전공 바꾸고 진로도 바꿨어요. 예전보다 못 벌어도 그때보다 재미있어요. 좀 다른 얘기지만, 차원씨가 상담하기 전에 제출하신 내용 중에 진로 관련 고민도 있어서 말씀드려요. 그런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내담자 | 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상담자 | 네 이제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어떤 얘기하고 싶으세요?
자기 신뢰감. 지금은 그것이 거의 전부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나 자신과 잘 지내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나 자신을 지켜내고 자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믿음이란 것이 이토록 든든한 것인지. 삶의 연속성 안에서 안정감을 만들어주는 감각인지. 이 날의 상담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1회기 상담 <고도로 우울한 33세, 내 인생 첫 심리상담>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sstate/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