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브리치 서양미술 중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예술과 생활의 일치 추구),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공예와 미술의 통일 추구),네덜란드의 더 스테일(De Stijl)은 미술과 미술의 기능에 대한 산업사회적 문제제기다.
곰브리치 처럼, 이 운동들을 기능주의(functionalism)로만 볼 수는 없다. 단순한 기능주의라고 한다면 이는 목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단적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즉 이런 기능주의적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 그리고 답을 찾았을 때 그 질문과의 내적 일관성에 대해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붙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추구한 것은 그런 기능주의적 접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목적 탐색적인 미를 연구한 것이다. 즉 “미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새롭게 반복되는 물음이다. 물음의 반복. 답이란 항상 다음 물음을 위한 준비였다.
따라서 이들이 미술의 기능에 대해 논했다고 해서 이들을 기능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미술과 미술의 기능의 관계에 대해 변화 된 산업사회라는 환경 안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재현의 모순에 대한 자각 - 인상주의(impressionism)
곰브리치가 언급한 “재현의 모순”이라는 말은 두가지의 측면을 가진다.
첫번째 재현의 모순은, 객관적 재현의 추구 결과 우리의 재현은 우리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재현이였다는 것이다. 이는 나아가 과연 “객관적인 재현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부터 전기인상주의 까지 미술의 역사에는 재현의 객관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전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것이 오히려 주체의 한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주관이 배제된 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지만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의 구성적 개입이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칸트는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라는 말로 이 모순에 대한 전모를 드러냈다.
두번째 재현의 모순은, 한 대상은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면을 보여 줄 수 있다(Perspectivism)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모네의 연작들은 빛의 변화를 추적해 제대로 된 재현을 추구했다. 시점과 상황에 따라 재현의 이미지는 다 다르게 나타났고 심지어 그 이미지의 재현은 연속적 스팩트럼으로 미분적으로 분할 될 수 있음을 암시하게 된다.
동시에 각각의 연작 작품은 다 나름의 재현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있고 각각 다 자신들이 본질적 지위에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작품의 가능성이 무한에 가깝다는 것이다. 참된 재현을 추구 하다가 악무한에 빠져버리는 당혹스런 상황이 된 것이다. 즉 재현의 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재현의 불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것이 재현의 모순이 가지는 두번째 장면이다.
****재현의 모순은 두가지로 나타난다. (다시 한번 더)
첫째, 객관 그대로의 재현을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주관의 선험적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모순을 맞닥뜨리게 된다.
객관적 재현의 이면에 있는 주관성이 구성적으로 설명 될 수도 있고 표현적으로도 설명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객관성의 탐구는 주관성의 탐구의 한 측면이라는 점이다.
또한 주관성의 탐구는 결국 그 주관성의 해체로 이어진다는 점까지 가야 한다. 주관성이란 생산 된 결과 이므로 그 생산의 조건들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 생산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주관성의 해체로 이어진다
둘째, 대상의 올바른 재현을 위한 모네의 연작은 오히려 재현 불가능성으로 떨어지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참된 재현의 추구가 가져온 재현 불가능성은 미분적 차이의 스팩트럼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이러한 이해는 그 스팩트럼이 가지는 추상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 추상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반복이다. 하지만 이 반복은 동일한 것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에 이를 때 비로서 살아있는 재현으로 완성된다.
-큐비즘은 기관없는 신체에 반복적인 perspective을 널어 놓은 것이다.
**** 후기인상파의 구성과 표현 , 큐비즘의 잠재태
재현의 첫번째 모순에서 주체는 대상을 반영하는 거울 역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재현에서 일정한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러한 주체의 능동적 측면에서 창작의 가능 지평을 발견한 것이 구성과 표현의 길이다. 구성은 대상의 재현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구성(construct)된다는 생각이다. 표현은 주체의 능동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밖을 재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능동적 투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구성은 지속의 최소 단위인 소(素)를 지닌다. 지속의 최소 단위는 사유의 최소 단위이다. 이 소를 기반으로 재현의 대상을 구성해 나간다. 소와 대상과 구성의 규칙이 이 지평의 기본 원리다. 세잔느는 이런 구성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구성의 지평은 대상, 즉 객관적 실재가 소여적 실재성을 지닌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 실재성은 구성을 위한 소여(所與)적인 실재성이다.
표현은 주체의 능동적 지평을 강조하며 주체의 능동적 투사로 재현을 갈음한다. 표현은 주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의 능동적 투사라는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은 어떤 주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광대란 예술의 지평으로 펼쳐진다. 이런 표현의 지평에서 활동한 사람은 고호와 고갱이다.
구성과 표현은 이후 나타나는 여러 미술 사조를 이해 하는 기본 지평이다. 이 지평들과 함께 재현의 두번째 모순에 대한 문제 의식을 이끌고 간 사조는 큐비즘 이다. 큐비즘은 대상의 미분적 연속성이 가지는 다면성을 대상의 잠재태 위에 널어 놓음으로써 대상의 재현을 구현한다. 대상의 재현을 구성이나 표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태 위에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대상의 측면들을 널어 놓는 것이다. 널어 놓는 것은 구성(construct)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잠재태로서 널려 있는 것이다. 이로서 큐비즘은 잠재태를 화폭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열게 된다.
—-(입체주의에는 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상주의 같은 perspective가 있는 것도 아니다.
큐비즘에는 잠재태가 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존재의 미분적 무한 다양성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과 내용성은 주관적 시점의 상대성으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로 종합을 이루는 데 그 원리란 바로 시점의 다양성이라는 원리이다. 시점의 다양성은 존재의 잠재태 위에 널려 있게 된다. 그렇게 널려 있음으로 시점의 다양성과 존재의 잠재태라는 두가지 측면이 동시에 표현 된다.)
****재현도 아니고 구성(표현)도 아니고 사물의 창조다.(브랑쿠시, 헨이 무어,자코메티)
전제(대리석)를 보존하면서 주체(입맞춤의 형상)를 세겨 넣는 작업이 브랑쿠시의 조각이다.
미켈란젤로가 전제(대리석)에서 주체(다비드상)를 구출해 내는 작업이었다면 반대로 전제의 잠재성을 남겨 놓고 최소한의 형태만을 부여해 그 형태의 단단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형태가 전제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잠시 드러났다가는 다시 흐리게 사라지는 형태임을 보여 주는 것. 또는 그 주체는 전제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다시 말해 대리석의 잠재성을 오히려 조각작품으로 엿보게 보여주는 것이 브랑쿠시의 조각이다.
이제
재현도 아니고
구성도 아니고
사물의 창조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적인 것을 창조한다. 바로 잠재성이야 말로 진정한 실재성이고 이 실재성을 통해서만 우리의 현실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질료인 돌이 가지는 잠재성(시뮬라크르-simulacre)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 자체의 잠재성을 현행화 하고 그 현행화는 질료의 한 측면 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잠재적인 돌을 현실적인 개체로 현행화 하는 일이다. 그 돌은 여인을 암시할 뿐이지 여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여인을 암시해주는 돌”은 다시 스스로 질료가 되며 사물이 된다. 맨처음 조각 전에 돌이 사물이었듯이 헨리무어가 조각한 돌도 사물이다. 사물은 사물로서 시뮬라크르이고 이 사물 위에 또 다른 의미의 레이어가 생성된다.
이제 조각가들은 베르니니같이 돌의 단순함을 지우고 사람의 피부를 이식하는 잔인한 짓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