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 - [오전 7시] 그림을 보고

by 반대로 선 거울



[오전7시]라는 그림은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정돈되고 그림자가 지루하게 늘어지는 느낌인데 그렇다고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적이 없는 어떤 인간의 흔적이 남기를 대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흔적을 待機라도 하고 있는, 이미 지루해진 아침. 그 문 앞에 누가 서 있게 될 것인가? 저 뒤의 깊은 숲의 아래로 깔리는 어둠의 알 수 없는 형상 속에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그리고 그 어둠을 뒤로 하고 밝은 문 앞에 서서 지난 어둠을 말 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서 있을 것 같은 ….

어떤 서사를 추출해 내라면 언제라도 새로운 서사를 만들 수 있지만 정작 이 그림에서 뭉쳐져 있는 것은 느낌이다. 그 느낌을 여러 방향에서 관통해 가는 서사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느낌에 비교해 본다면 그 서사들이란 유치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특수성으로 어떤 느낌으로 표현되는 그림이다. 이때 보편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나 실증주의에서 말하는 형식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루한 동일성이 아니라 어떤 사건의 특수성으로서 매번 달리 표현되는, 그렇지만 같은 느낌이다.

서사가 선과 같이 전개 되고 그 전개 안에서 이런 저런 사건이 발생하고 그런 사건 중에 하나로서 [오전 7시]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로 설명 가능한 것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아니 그런 그림을 그릴 필요 조차도 없다. 그렇게 이미 볼짱 다 본, 물이 다 빠진 지루한 이야기를 그릴 필요가 있을까?

[오전 7시]는 거기에서 무한한 서사가 가능한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그 그림을 볼 때 마다 우리는 매번 다른 이야기를 시작 할 수 있다. 같은 그림이지만 그리고 같은 사람이 그 그림을 보지만 우리는 그 때 마다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그림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불일치하고 무언가 말을 하게 만들고 무언가 잡히지 않는 그 느낌들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더 주사위를 던지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주사위 처럼 우리는 그 그림 앞에서 기묘한 느낌과 그 느낌이 강요하는 언어적인 설명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결코 답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 느낌이 추동해서 던지는 주사위는 단지 다음 던지기를 기약 할 뿐 답다운 답을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느낌의 잠재화 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그림, 무한한 서사를 출발 시키고 곧 바로 그 서사의 무실함을 비웃는 그림.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그림에는 말로 끝나지 않는 잠재화의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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