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숙 Nov 24. 2023

콩이

지난 뜨거웠던 여름, 막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되었다. 그 더위가 막바지에 이를 때쯤 막내는 서너 발을 떼더니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추석 무렵엔 내가 잠깐씩 한눈을 팔아도 넘어지지 않고 곧잘 걸어 다녔다. 걸음마를 통해 자신의 몸을 조절하는 법을 깨닫게 된 막내는 그 이후로 기지 않았다. 계속 걷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을 먹고 놀이터나 바로 옆 산책로로 나가는 게 루틴이 되었다.


산책로는 한눈팔게 하는 놀이시설이 없어서 계속 걷기에 좋았다. 한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는 큰 나무들이 가득해서 마치 작은 숲 속에 온 듯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씩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줍기도 하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도토리를 줍기도 했다. 새들이 물을 자주 마시러 오는데 비둘기나 참새는 물론, 스포츠머리를 한 직박구리, 턱시도를 입은 박새, 심지어 우아한 포즈로 물을 마시는 새하얀 백로를 본 적도 있다. 네모진 아파트와 빌딩 속에서 둥근 자연을 느끼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날도 걷고 싶어 하는 막내와 함께 산책로를 왔다 갔다 하다가 잠시 쉬고 있었다. 쉴 때에 우리는 시냇물 속에서 살랑살랑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멍하니 구경했다. 근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운이 산책로 쪽이 아니라 나무데크 아래 구석진 곳에느껴졌다. 우리한테 눈을 떼지 않았다. 봐야 다. 아, 사실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보기가 싫었지만 돌아봤다.


까만 콩처럼 동그랗고 반짝이는 두 눈. 마주쳤다.


이전에도 그 녀석을 멀리서 본 적이 있다. 짙은 회색빛 털, 긴 꼬리가 나무에서 시냇물 쪽으로 샤샤샥 지나갔었다. 난 그 꼬리가 유독 다. 그 꼬리만 없었어도, 아니 좀 짧거나 복슬복슬한 털로 덮여있었어도 이렇게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꼬리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와 등이 움찔거리고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비명과 함께 줄행랑친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자동반사적 행동이다.


근데 이상하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난 소리를 질렀고, 막내를 들고 뛰었다. 근데 꼬리를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쥐들은 항상 꼬리를 보이고 먼저 도망가는데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나 보다. 이 당돌함, 뭐지?(새로워!) 집 앞에 오니 까만 바둑알처럼 동그랗고 반짝이는 두 눈이 날 보고 있다. 막내가 무슨 일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곳에 가지 않다가 그 놀람이 희미해질 무렵, 막내가 자꾸 산책로로 손을 이끌어 그쪽에 다시 가게 되었다. 어김없이 나무데크에 올라서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는데, 저 위쪽에서 동그란 회색 털뭉치가 수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녀석이다! 원래 같았으면 이미 소리를 지르고 내달렸을 텐데, 세 번째 만남이라 그런가 소름은 돋았으나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같은 녀석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무데크 주변에서 계속 보이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다). 이쪽으로 오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녀석은 무심하게 물속에서 나와 콩콩콩 뛰어서 나무 쪽으로 갔다. 쥐는 대부분 바닥에 딱 붙어서 샤샤샥 지나가는데, 저렇게 점프하는 모습이 신기했.(귀여워!) 날 이렇게 대하는 쥐는 처음이야! 이런 느낌이랄까?


사실 쥐에 대한 엄청난 공포와 혐오는 초등학교 때 시작됐다. 슈퍼에새콤달콤을 딸기맛을 먹을까, 포도맛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딸기맛을 집어드는 순간 살색의 긴 줄이 쓱 보였다 사라졌고, 과자봉지 사이로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숨는 쥐의 뒷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였다. 평생 쥐에 대한 이 불편한 감정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내 덕분에(?) 그 녀석을 3번 보고 좀 나아졌다. 심지어 귀엽다고 느끼다니 기적이다. 할머니들이 도토리도 다 주워가고 날도 추워지면서 요즘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눈도 까만 콩을 닮았고, 점프도 콩콩콩 잘하니까, '콩이'라고 하면 어떨까? 아직 내 마음이 100% 열리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긍정적인 변화다. 막내 때문에 내 딱딱한 마음이 자꾸 말랑말랑해진다. 쥐에게 이름을 지어주다니! 마흔에 별 걸 다 해본다.


'콩아, 올 겨울 잘 나고, 다음 봄에는 마주치지 말자. 안녕!'




이전 08화 비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