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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숙 Nov 28. 2023

비우고 채우기

"어머님, 지갑에 돈이 10만 원 있을 때와 1000만 원 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만 원짜리 물건을 산다고 하면, 어떨 때 더 쉽게 만 원을 낼 수 있으시겠어요? 1000만 원 있을 때의 만 원은 그다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낼 수 있는 금액이지만, 10만 원 있을 때의 만 원은 여러 번 고민하다가 그 물건을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겠죠. 지금 주원이는 무언가 꺼내야 할 시기가 아니에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만들어보면서, 스스로 끝까지 완성해 보고, 인정과 칭찬을 받으면서, 지갑을 두둑이 채워야 할 시기랍니다. 그 시기가 끝나면 단계별로 도전해 나가야죠. 하나씩 꺼내보면서 해야 할 것, 해보지 않았던 것을 배워나갈 거예요. 기다려주세요."


아들이 미술학원을 다닌 지 4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늘 괴물과 악당, 알 수 없는 게임캐릭터들을 만들어와서 언제쯤 그리기를 하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이었다. 아이도 없는 젊은 남자 선생님한테 엄마의 욕심과 조급함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곳은 남자아이들만 다닐 수 있고, 남자 선생님만 가르치는 미술학원이다. 아들은 매일 가고 싶다고 할 정도로 즐겁게 다니고 있지만 실제로 지갑이 두둑하지 않은 나로서는 낸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조금 채워놓고 언제 꺼내냐고 물었으니 내가 얼마나 욕심쟁이로 보였을까?


아이를 낳기 전에는 기다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할 때부터 굉장히 힘든 일임을 알긴 했다). 걷기, 기저귀 떼기, 말하기, 놀이하기, 학습하기, 사회성 발달시키기 등 아이는 시기별로 발달해야 할 과업이 있다. 엄마는 그 옆에서 기다리면 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분명 아이마다 차이가 있고 잘 안 되는 영역이 있을 텐데 조금 늦어지는 건지, 아예 못하는 건지,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 엄마들은 마냥 기다리기보다 빨리 해결해 주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실수할 기회, 실패할 기회, 그래서 다시 일어설 기회, 배울 기회를 모두 놓치게 하면서 말이다.


요즘 아들이 학교와 영어학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다고 다. 배터리로 치자면 방전된 느낌이라고. 그동안 나에게 교육의 '채우다'의 의미는 매일의 공부습관, 많은 경험과 도전, 한 단계 높은 목표 설정이었다. 아들은 곧잘 따라왔는데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렇다 할 해결책없어 고민하던 찰나, 미술학원 선생님의 답변에서 교육의 '채우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들이 '원하는' 공부나 놀이를 하게 해 주었는가?

#했다면 '끝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왔는가?

#'충분한' 인정과 칭찬을 주었는가?


원하는, 끝까지, 충분히를 하지 못했다. 아들이 한국사관심을 가질 때도, 곤충채집에 신나 할 때도, 마인크래프트에 푹 빠져 있을 때도 끝까지 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 인정과 칭찬은 둘째치고 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심지어 마인크래프트는 게임이라는 이유로 아예 못하게 할 때도 많았다. 지갑에는 돈을 채워야 하고, 물통에는 물을 채워야  한다. 아들에게는 아들의 것으로 채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이제 하나씩 비우고, 다시 너의 것으로 채워보자. 


채우는 건 아들이 하고, 기다리는 건 내가 해야 한다. 가만히 기다리는  고역이지만, 기다리면서 무언가 한다면 그 또한 나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그 '무언가'가 책과 글쓰기가 되길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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