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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숙 Dec 07. 2023

노력

뭘 먹다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쪽 아래 어금니 가운데가 뻥 뚫렸다. 때운 게 똑 떨어져서 자꾸 그 사이에 음식물이 꼈고 잘 빠지지도 않았다. 치과에 갔더니 더 이상 때울 수 없고 원래 이를 최대한 살려서 보철물을 씌워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그 뒤에 있는 썩은 사랑니를 먼저 빼자고 했다. 잇몸 깊숙이 박혀 있는 데다가 뿌리 역시 신경 바로 옆에 있어서 동네 치과에서는 다들 못 뺀다고 했다. 근데 집 앞 치과에서 할 수 있다고 하니 진짜 가능하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다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안면마비가 올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듣고 사인을 한 후에야 사랑니를 뺄 수 있었다. 뺄 때는 그다지 안 아팠지만 빼고 난 후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몰려오는 고통은 정말 끔찍했다(안면마비가 오지 않았음을 단번에 느꼈다). 와! 외마디 비명을 던지고 바로 약을 털어 넣었다. 내가 약을 이렇게 꼬박꼬박 잘 챙겨 먹었던 적이 없었는데 그 심각한 고통 앞에서는 진통제가 신이었다. 그리고 오늘, 일주일이 지나서 실밥을 뽑고 앞에 어금니를 가는(?) 작업을 했다. 그 특유의 날카로운 기계음에 소름이 돋고 깜짝깜짝 놀랐지만 잘 참아냈다. 마취가 풀리자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통. 생니를 뽑아내는 고통보다야 덜했지만 생니를 깎아내는 고통 또한 참기 어려웠다. 진통제를 찾았다.


그 뼈를 깎는 고통을 매일 겪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서 어릴 때 주어진 환경, 자라면서 스스로 만들어간 조건들로 이루어진 나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려면 말이다. 사람은 부모와 형제에게서, 선생님이나 친구에게서 받은 수많은 영향들로 태도가 만들어지고 삶이 완성된다. 물론 타고난 유전이나 기질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내 부모에게서 없는 것이 나올 수 없기에 넓은 의미에서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 나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게으르고, 부정적이고, 자존감 낮고, 자신감 없는 나의 모습이 싫다면? 바꿔야 한다. '난 원래 그래. 내가 그렇지, 뭐. '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이전의 내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다. 사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에 남아있는 잘못된 습관, 그로 인한 불편한 감정을 없애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다시, 쉽게 제자리에 오고 만다.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한 이유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 딸아이를 무섭게 혼내고 후회와 자괴감에 휩싸인 채 잠자리에 들려고 누웠다.


"엄마가 미안해. 많이 무서웠니?"

"응..."

"엄마는 화가 나면 참을 수가 없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엄마도 어릴 적에 그렇게 혼났네..."

"그럼 할머니도 할머니의 엄마한테 그렇게 혼났어?"

"그랬겠지. 할머니도 어릴 적에 엄마한테 그렇게 혼났을 거고, 할머니의 할머니도 엄마한테 그렇게 혼났을 거고..."

"그럼, 우리 첫 번째 할머니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나 봐. 근데 왜 아무도 무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안 했을까?"


과연 딸아이의 말대로 왜 아무도 노력을 안 했을까? 난 노력했을까? 말로만, 머리로만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써보긴 했을까? 그냥 소리치는 게 쉽고, 화내는 게 상황을 빨리 마무리질 수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닐까? 훈육이라는 명목 아래 내려왔던 애매한 방식의 학대. 누구는 엄마도 사람인데 아이한테 화도 못 내고 소리도 못 치냐고 하지만 사람이기에, 어른이기에 감정을 그렇게 마구 쏟아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타인에게도 그렇게 한 적이 없기에 내 소중한 아이에게는 더더욱 하면 안 될 을 종종 하고 있다. 소리치고 비난하고 가끔은 몸을 흔들면서 제발 좀 그만하라고 할 때가 있다. 그 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된지도 모르고, 모든 것이 다 너 때문이라는 듯 퍼부을 때가 있다. 때리지 않았으니까 학대가 아니고, 밥을 안 주지 않았으니까 학대가 아니라고 말하기엔 아이의 눈물이 슬프고 그 마음의 상처가 아프다.


잘못된 방식의 육아를 바꾸는 것 역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 똑같다.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빼내야 할 썩은 사랑니처럼, 새롭게 덮어씌울 보철물에 맞게 깎아내야 할 어금니처럼 그 고통견디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내야 하는 건, 사랑니를 위해서도 아니고 어금니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를 위해서이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아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겨눠진 내 삶의 방아쇠였을 뿐이다. 왜 당겼냐고, 안 당겼으면 그냥 그렇게 겨눈 채로 평생 살면 되었을 텐데 하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는 잘 살고 싶고, 내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더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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