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숙 Mar 08. 2024

선택

책을 고를 때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그냥 표지나 제목에 확 끌려서 손이 가는 책이 있다. 특히 책 내용을 제대로 훑어볼 수 없는 온라인에서의 선택은 더욱 그렇다. [엄마를 사랑해서 태어났어] 제목부터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이 책이 그랬다. 표지는 또 얼마나 귀여운지,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무언가 내려다보는 그림이 한참 미소 짓게 했다. 일본 작가여서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귀엽게 그려진 그림책일 것 같아서 보고 싶었다.


도서관 사서에게 책을 받아 든 순간, 생각보다 작은 크기(어른 손바닥 정도)여서 '어?' 했다가, 책을 펼친 순간 그림책이 아니라 인터뷰집이어서 '엥?' 했다. 일본의 산부인과 의사인 작가가 아이들이 엄마 배 속으로 오기 전의 기억에 대한 인터뷰를 묶은 것이다. 일본 작가였을 때 내가 고개를 갸웃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남매둥이 임신 전 온라인 서점에서 도서 콘텐츠를 담당했던 나는, 일본 작가들의 책이 다소 엉뚱하고, 깊지 않은 느낌을 받았었다(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일상을 잘 풀어내는 거였지만). '왜 출판사서평 같은 보도자료를 안 봤을까?' '블로그나 리뷰 같은 거라도 찾아볼걸.' 잠깐 후회했다가 책이 워낙 얇아서 그냥 읽었다.


결론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인터뷰를 한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있는 3살부터 십 대까지 다양했고, 심지어 이십 대인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엄마 배 속도 아닌 그 이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게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상에 가까운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태어나기로 한 것은 스스로 정했고, 엄마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하느님, 천사, 요정 같은 꿈같은 얘기들도 있었다. '이게 뭐야?' 하면서 계속 뒤적거리다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주원아, 소원아, 혹시 엄마 속에 오기 전에 기억나?"

"응, 당연히 기억나지~"


기억난다고? 두 아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어디까지 하나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었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말을 이어가는데, 이게 둘이 짠 건지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지만 그냥 흘려듣기엔 내용이 꽤 구체적이었고 나중에는 신뢰감 마저 들었다.


"우리 둘이 엄마를 동시에 골라서 서로 하겠다고 막 싸우고 있는데, 하나님이 싸우지 말고 그냥 같이 가라고 버튼을 눌러줬어. 그럼 미끄럼틀 같은 걸 타고 쭉 내려가거든? 거기에 또 많은 아이들이 있어. 다들 엄마를 선택한 아이들이야. 모두 태어날 수 없으니까, 달리기 시합을 해서 3등 안에 들어야 한대. 우리 둘은 충분히 컸고 많이 훈련받아서 빠르게 달릴 수 있었어. 주원이는 1등이었고 난 3등이었는데, 2등이 결승선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우리 둘만 태어난 거야. 아참, 자세히 보니까 그 넘어진 2등이 채원이 같아. 왜냐하면 계속 도전할 수 있거든. 채원이는 다시 자라서 훈련을 열심히 받고 나중에 1등이 돼서 태어난 거지."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인공수정을 몇 번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한 시험관 시술에서 난자채취가 아주 잘 됐다. 28개의 건강한 난자들이 나왔고 그중 3개를 수정시켜서 자궁에 넣었는데 남매 쌍둥이가 태어난 것이다. 당시 쌍둥이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혹시 3개의 수정란 중에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모르니 남편과 나는 '뚜비', '뚜바', '뚜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 얘기를 남편과 나는 아이들 앞에서 한 적이 없다. 근데 3등 안에 들어야 태어날 수 있는데, 2등이 넘어져서 둘만 태어났다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이들은 정말 태내 이전의 기억이 있는 걸까? 놀라움과 혼란이 뒤섞였다가 갑자기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근데 얘들아, 왜 엄마를 선택한 거야?"

"엄마가 아빠랑 너무 재밌게 놀아서 같이 놀고 싶었지~" (딸)

"엄마가 아빠랑 여행을 자주 가서 나도 같이 여행을 가고 싶었어!" (아들)


그랬다. 연애시절 우리는 돈이 없어서 근사한 데이트는 못했지만 둘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다. 결혼해서 좀 여유가 생기고는 국내외로 여행을 자주 갔다. 두바이도 가고, 이탈리아도 가고, 사이판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단양도 가고, 대전도 가고 그랬다. 아이들의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퍼즐처럼 맞춰지는 이야기들이 마냥 신기했다. 어쩌면 내가 선택 '한' 모든 것들이, 선택 '당한' 운명 같은 것이었을까?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힘들었던 그 시절, 사실은 많은 아이들이 나랑 재밌게 놀고 싶어서, 여행을 가고 싶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열심히 달리기 시합을 했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나 엄청 인기인이었네?) 우리 아이들의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열심히 놀고, 자주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었다. 더불어 늦게라도 다시 훈련받고 열심히 달려와 준 막내에게 고마웠다. 나중에 말을 하게 되면 나를 엄마로 선택한 이유를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설마 아직도 훈련 중인 아이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전 16화 3월,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