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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숙 Apr 04. 2024

2024. 04. 04 맑음

벚꽃나무

엊그제까지만 해도 봉오리 져 있던 아파트 단지 안 벚꽃이 만개했다. 길가의 벚꽃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지치기를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꽃이 활짝 폈어도 그 나무의 모양새가 볼품이 없었다. 볼 때마다 아픈 이가 애써 미소 짓는 느낌이 들어서 안타까움 마저 들었다. 그래도 하루 이틀 만에 '하나, 둘, 셋!' 약속이라도 한 듯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쌍둥이를 학교에 보내고 막내까지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그 길로 바로 근처 호수공원으로 향했다. 세수도 안 하고 머리만 질끈 묶은 채 커피 한 잔을 사서 걸어갔다. 큰 건물들과 8차선 도로를 지나 육교를 건너면 바로 넓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그 공원에 벚나무가 있었나 없었나 잠시 떠올리던 사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벚꽃 길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매년 비슷한 풍경을 마주하지만 매번 잊어버리고 처음 본 듯 예쁘다고 호들갑이다.

2024년 4월 4일 오전, 상동호수공원 벚꽃나무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내 생애 가장 큰 벚꽃나무를 본 기억이 난다. 거대했고, 아름다웠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날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그 친구는 성적 때문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의 성적에는 무관심했던 우리 아버지는 오직 당신의 문제(술이었나, 여자였나 기억은 안 나지만 둘 중 하나였다.) 때문에 힘들어하셨기에 그 부모다운 관심과 간섭이 살짝 부럽기까지 했었다. 어찌 되었건 그 무섭고 강했던 친구의 아버지는 나이가 들고 병이 들고 결국 돌아가셨다. 전후사정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다른 건 묻지 않았고, 너는 괜찮냐고 물었고 친구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한 가지 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이 무어냐고 물었다. 괜한 질문은 아니었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은 무슨 말을 남길까 궁금했다.


"수고했대. '태랑아, 수고했어.'라고 하셨어."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뭉글해졌다. 우리 아빠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도 아니었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신감정이 아닌 딸의 삶과 노력을 인정해 주는 말. 그 간결하고 담백한 말속에는 '지금의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너는 최선을 다했고, 나는 알고 있어. 그걸로 충분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젖먹이 아이가 울어대서 먼저 장례식장을 떠난 친구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벚꽃나무를 마주했다. 어둡고 무거웠던 그날의 밤과 달리, 하얗고 예쁜 벚꽃을 만개한 그 나무가 유난히 아름다워서 함께 조문을 갔던 친구와 사진까지 찍었다. 죽음과 삶은 길 하나 건너의 차이였고, 슬픔과 기쁨도 몇 분 사이로 바뀌었다.

2023년 3월 30일 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길건너 벚꽃나무

근데 참 이상하지? 이렇게 수많은 벚꽃들이 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향을 맡은 기억이 없다. 실제로 벚꽃나무는 그 찬란한 모습과 달리 향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기억이 날듯 말듯, 꿈인 듯 현실인 듯. 그래서 매년 봄을, 벚꽃을 기다리나 보다. 잊고 다시 만나고, 잊고 다시 만나고....... 만날 때마다 예쁘다는 말은 하지만 헤어질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예쁜 풍경을 만들어준 고마움, 금방 지나가는 아쉬움, 내년 봄을 다시 기약할 그리움ᆢ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좋고, 덧붙여 말도 더하고 싶다.


'수고했어.'


사람도, 나무도 내가 모르는 치열한 삶을 견뎌왔고, 지금도 견디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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