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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숙 Apr 30. 2024

2024. 04. 30 맑음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고 있다. 70~80년대 평범했던 일상의 이야기를 어쩜 이렇게 담박한 언어로 술술 써냈까? 40~50년 전의 서민들의 삶이 전혀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게, 읽히는 게 신기했다. 작가의 필력이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화장실 청소를 미뤄둔 채 작가의 어린 시절의 집과 동네, 고향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의 그 집이 떠올랐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전혀 없었던 그 시절, 잠깐이었지만 최초로 내 방이 생겼던 그 집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하다. 3~4개월 밖에 살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그 집의 문과 구조, 심지어 집의 냄새까지도 맞출 수 있을 정도니까. 당시 나는 7살이었다.



주택 1층이었던 그 집은 지하는 아니었지만 꼭 지하처럼 빛이 들지 않았고 습했다. 창문도 없었고, 겉에서 보면 마치 2층 주인집과 계단을 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고를 개조해서 세를 들였던 것 같다. 현관문도 위는 유리, 아래는 알루미늄처럼 가벼운 철로 되어 있었다. 열쇠가 있었지만 문의 절반이 유리라 7살인 내가 보기에도 유리를 깨고 문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그 집에서 살았던 3~4개월 동안 도둑만 3번을 맞았고, 딱히 가져갈 게 없었던 우리 집은 내 빨간 돼지저금통만 연신 배가 갈렸다.


하지만 그 집에서 가장 끔찍했던 건 도둑이 아니라 비였다. 비가 오기 전날이면 그 습한 기운이 온 집안을 가득 메웠고 엄마는 봄인데도 보일러를 아끼지 않고 틀어댔다. 안방 바닥은 금세 따끈해지면서 보송보송해졌지만 이상하게 내 방은 온기가 미치지 못했다. 습하면서 추운 그곳은 아예 방문을 닫아버렸고 창고가 되었다. 그런 날은 엄마가 주방에서 어디서 자꾸 지렁이가 한 마리씩 들어온다며 구시렁거리 했다.


6월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우리 집은 더 습해졌다. 그날은 엄마가 나에게 창고방에서 뭘 꺼내오라고 시켰다. 오랜만에 방문을 연 나는 그 자리에서 악을 쓰고 엄마를 불러댔다.


"엄마아아아아악! 엄마! 엄마! 엄마!"


7살 생애 그렇게 긴 지렁이들은 본 적이 없었고, 42살 생애 지금까지도 지렁이들이 일제히 하얀 벽을 기어오르는 광경은 본 적이 없다. 달려온 엄마는 그걸 보고 나에게 방문을 빨리 닫으라고 소리쳤다. 그날 저녁, 어김없이 술에 취해 돌아온 아빠를 붙들고 엄마는 펑펑 우셨다. 이 집에서 정말 살기 싫다고 아이처럼 울었다. 아빠는 술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가만히 듣고는, 주인집에 올라가서 술 취한 사람 모습 그대로 난리를 쳤다. 이게 사람 살라고 내놓은 집이냐고, 보증금을 당장 돌려달라고 말이다. 얼마 후 우리는 멀지 않은 어떤 주택의 3층 단칸방인지 옥탑방인지로 이사를 했다.


그 뒤로 엄마는 바퀴벌레도 안 무서워하고, 쥐도 안 무서워하는데 지렁이만 보면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다. 나는 지렁이 이후로 더 강렬했던 쥐와의 만남 덕분에(?) 쥐를 더 싫어하게 되었지만 지렁이도 여전히 싫다. 얼굴이 없는 것도 싫고, 온몸이 까진 살갗처럼 생긴 것도 싫고, 행여나 밟혔을 때 요란하게 꿈틀대는 것도 싫다. 이걸 모르는 아들이 길에 올라온  지렁이들을 직접 옮겨주려고 해서, '지렁이는 독이 있다' '지렁이는 세균이 있다' '지렁이도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다(?)'며 절대 못 만지게 했다. 아들은 엄마도 동물이면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냐며 나에게 화를 다. 나도 모든 동물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싶은데,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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