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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Nov 19. 2023

'여유 포비아' 김미지 구하기

“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얼마 전 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상까지 받은 동생 미지가 말했다. “그러게, 그래 보이네.” 나는 그 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대꾸했다. 내가 주말마다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 호기롭게 동생을 데려왔고, 식탁의 한가운데서 맛있게 양념된 대창이 자글자글 익고 있었다.


“공부보다 재밌는 걸 못 찾겠어.” 조금 재수 없어 보일지는 모르나 미지가 대학교를 입학하고부터 꽤 자주 뱉었던 말이었다. 처음에는 친언니인 나조차도 ‘무슨 저런 돌 맞을 법한 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함께 저녁을 먹은 그날, 비로소 조금 더 자세한 보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미지의 말을 빌리자면, 게임이든 운동이든 가끔의 취미생활은 쾌락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몰랐던 공식의 해답을 알아내거나 꽉 막혀있던 정답을 알아내는 순간 등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도파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는 애가 그렇게 높은 성적을 받고도 행복하지 않다니? 나였으면 너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미지도 내 의문에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미지의 전공은 ‘물리학’이다. 물리학과 정말 거리가 먼, 상경 계열을 전공한 나로서도 가끔 영화나 책에서 물리학을 접했을 때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세상의 만물을 탐구하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져야 하고, 그런 것 자체만으로 흥미를 느껴야 지속해서 공부할 수 있다.


그런데 미지는 최근 이런 점에서 벽을 느꼈다는 것이다. 특히 연구실의 직속 멘토 선배와의 소통에서 ‘왜 너는 모든 것이 그냥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수긍하냐?’라는 피드백이 발화점이 되었다. 그동안 미지 자신도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던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 들킨 것만 같아 처음엔 화가 났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없어서 반가우면서도 또 막막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한 문제라도 물어뜯고 다각도로 바라봤는데, 대학생이 되고 난 이후 성적을 최우수로 받으면서도 그런 탐구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매번 그 선배를 보면서 ‘왜 나는 저런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지?’라며 자책하거나, 시험이 끝나면 등수에서 위안을 찾는 무의미한 일에 몇 시간을 투자하며 현타가 왔다고 한다.


“미지야, 굳이 왜 자책해? 그냥 그 점을 계기로 ‘아, 내가 이런 점은 생각 못 했으니, 다음에는 더 다양하고 넓게 생각해 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내가 미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자, 미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맞네. 나는 왜 매번 나를 그렇게 몰아세울까?”


이어서 들은 이야기는 미지의 학교생활 근황이었다. 학교에서 시험이 끝난 후 올해 들어서야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여유가 너무 공허하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교수님께 찾아가서 공부할 거리를 더 달라고 했다. 그와 동시에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보며 몸과 머리가 덜 바쁜 걸 참지 못해 또다시 자신을 혹사하는 일을 자처했다는 걸 깨달아서 씁쓸했다고 한다.


미지는 똑똑하고 총명하다. 내 동생이지만 어떨 때는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나에게 속 깊은 조언을 해줄 때는 그 애의 많은 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지가 이토록 성적과 공부에 민감한 이유도, 우리 가족과 본인의 미래를 벌써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성공과 부를 안정적으로 획득하고, 최종적으로 우리 부모님의 노후와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스물둘의 대학생이 벌써 그런 큰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미지라도, 아직 사회에서 홀로서기엔 경험치가 여실히 적은 새내기였다. 어떻게 자신만의 여유를 가져야 하고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여유는 없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하고, 여가 시간이 생기면 얼마만큼은 늘어져 있어도 되고, 가끔 강박이 들어도 어떤 방식으로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미지야 세상에는 분명 네가 아직 모르는,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들이 더 있어. 나도 아직 세상을 잘 몰라서 책이나 알바처럼 엄청 많은 경험을 해보면서 자꾸 생각을 넓히고 있거든. 당장 1년 뒤에도 오늘을 회상하면 기분이 새로울 거야. 그때 내가 그런 걱정을 했다고? 그렇게 시야가 좁았다고? 이러면서 말이야. 내 생각엔 네가 플랜 B, C 없이 한 곳만 너무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더 여유가 없는 게 아닐까”


그리고 다음 말은 내가 예상한 것처럼, 그 문장이 나왔다. “언니, 나 곧 4학년이야. 원래 여유로우면 안 돼. 당장은 성적이 급하고, 언니가 말한 것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충분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멘트처럼 맞받아쳤다. “이거 봐.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 공부에서 더 확장된 시야를 바라든, 일상에서의 행복함을 바라든, 왜 너에게 변화가 찾아오길 기대하는 거야.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거 아닐까? 꼭 강박처럼. 내가 보기엔 그래. 너 꼭 ‘여유 포비아’ 같아. 여유라는 단어만 나오면 치를 떨잖아.”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여유에 대해서 너무 인색할 필요 없어. 여유는 꼭 나태나 태만을 뜻하지만은 않는다고 생각해. 네가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울 때 객관화해서 컨트롤할 줄 아는 것도 여유의 한 종류야. 높은 성적에도 기뻐할 틈마저 자신에게 주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더 큰 일들을 네 속에 담을 수 있겠어.” 내가 생각해도 약간의 꼰대 기운이 올라왔다고 느꼈지만, 조심스럽게 전하되 돌려 말하진 않았다. 나 또한 미지에게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바를 있는 그대로 건넨 첫 순간이었다. 사실 이런 대화가 몇 번씩 오갈 때마다 늘 속으로만 생각했던 의견이었지만 그동안은 삼켰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는 그냥 털어놓고 말했다.


미지가 본인의 몫을 스스로 잘 해내는 것과는 달리 어느 순간부터 안색이 편안해 보이거나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적당한 겸손과 긴장감을 위해 안주하지 않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극도의 예민함 때문에 몸이 못 버텨내거나 부모님조차도 미지의 시험 기간에는 함께 조심스러워졌었다. 내가 아는 원래 미지는 농담도 잘하고, 잘 웃기도 하고, 실없이 재밌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최근 가족이 미지에 대해서 언급할 땐 ‘미지가 그걸 좋아할리가...’ ‘미지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등 부정적인 단어와 눈치가 앞섰고, 누군가와의 대화에서도 스스로 하는 다짐과 최면처럼 ‘나는 여유로우면 안 돼’를 은연중에 강조했었다.


미지는 이런 대화를 통해 큰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자신의 면모를 되짚어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인간 자극’이야.” “자극을 주는 존재면 좋은 거 아냐?”


“아니야. 좀 달라. 음, 그러니까 언니를 예로 들면, 언니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부여 같은 느낌이라면 나는 같이 있으면 상대방이 불안해지고 경쟁의식을 만드는 그런 자극이랄까? 그런 말을 종종 들었어. 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의미의 자극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미지는 이어서 말했다.


“언니가 요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아. 오히려 지금은 떨어져 사는데도 같이 살았을 때보다 훨씬 잘 지낸다고 체감되는 기분? 엄마와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 그래서 난 언니가 지금 걱정이 안 돼.”


매번 내 걱정만 하던 네가 이제 괜찮아졌다니, 다행이다. 그럼 나도 내 식대로 잘 지내고 있는 거네-라고 말하며 나는 눌어붙은 우동 사리를 한번 휘적였다. 그리고 나는 미지에게 말했다. 너도 충분히 좋은 자극을 주는 사람이고 여유를 되찾으면 훨씬 행복할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어떤 상황을 바라보더라도 자책보단 좋은 쪽으로 자꾸 생각하고, 때로는 옆에 있는 우리나 친구들에게도 마음 편히 기대보라고. 네가 우리를 믿고 의지해야 우리도 너를 편하게 품고 보듬어 줄 수 있다고.


미지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내년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 언니가 말해준 대로 조금 더 여유를 가진 마음으로 공부하면 얼마큼 더 발전할지 기대되고 궁금해.” 나는 반짝이는 눈의 미지를 보며 늘 떠올렸다. 넌 분명 지금의 나보다 더 멋있게 성장할 수 있고, 나보다 더 나은 길을 걸어갈 수 있어. 나는 어떤 일을 겪든 회복탄력성이 좋으니까 너는 걷지 않아도 될 고생길은 걷지마. 그런 건 내가 미리 알려줄 테니 네 나이다운 여유를 되찾길.


그렇게 다시 각자의 터전으로 돌아간 지 5일 뒤, 미지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전화를 받지 못한 내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이틀 동안 몸살로 앓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꿈에서도 논문을 쓰는 등 강박에 시달리며 기분도 컨디션도 별로였나 보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침체된 채 며칠을 방에서 지냈을 자신인데, 나랑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연인에게 먼저 바람을 쐬자고 연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바깥공기를 쐤더니 한결 나아졌다는 말로 연락이 마무리 지어졌다. 이제야 좀 스물두 살 김미지 같다고 생각한 나는 ‘언제든지 만나자고, 수다 떨자고 전화해. 난 언제든 갈 준비 완료!’라며 진부하지만 나만 할 수 있는 진심 가득한 답장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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