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 Nov 12. 2023

어떤 농도의 사랑을 하고 있나요?

당신은 지금 어떤 농도의 사랑을 하고 있나요?


저는 한때 화려한 프라페 같은 맛에 끌렸어요. 달콤한 첫입에 혀가 녹아버릴 것 같고, 알록달록한 색감에 정신 못 차리거나, 휘핑크림을 숨도 못 쉴 만큼 가득 머금은,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만이 사랑이라고 믿었답니다. 늘 신나며 설렘 가득하고, 다음 페이지가 궁금한 만화책 같은 감정들요.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색깔도 무늬도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왜 있잖아요, 설탕도 시럽도 들어가지 않아서 쌉싸름한 아메리카노처럼요.


그런데 언젠가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왜 옅고 흐릿한 사랑만을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 달콤했던 시작과 다르게 끝은 엉망진창인 걸까. 원인은 두려움이었어요. 상대방과 조금만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랑과 감정 표현에 있어 서투른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게 싫었어요. 마음먹는다고 해서 어리광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서운함이 안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감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처음에 다짐한 성숙함과 쿨함과는 정반대로 유치해지고 찌질해지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나 봐요. 갈등을 겪을 때의 나는 꼭 휘핑크림을 다 먹은 뒤, 바닥에 가라앉은 토핑 덩어리들과 덜 녹은 얼음들이 뒤엉켜 먹기 싫게 생긴 음료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불완전한 내 모습이 들키기 싫어서 완벽한 부분만 보여주려고 애썼어요. 미련한 고집을 부린 거죠. 마치 가장 맛있는 부분이 사라지고 나면 재빨리 그 위에 다른 과일을 얹고, 녹아서 없어지면 또다시 오레오 같은 과자로 눈을 돌리고…이런 방식으로요. 하지만 역시나 오래 지속되진 못했어요.


화려해 보이는 토핑 층 아래는 더 괴상한 음료 반죽이 되어갔어요.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거나 혹은 하지 않으며 혼자 삭이고, 좋으면 좋은 대로 흘러간 시간은 점점 제 속을 뒤틀리게 했어요. ‘짐이 될까 봐’, ‘나를 이렇게 생각할까 봐’ 등의 이유로 진심을 털어놓지 않는 면모는 되려 오해를 일으키고, 표현 없이 내 생각이나 마음을 읽어주기만을 바라며 본의 아니게 생채기를 주기도 했어요. 결국 맛은 뒤죽박죽 섞이고 원래 이 음료가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기이한 장식들로 뒤덮인 채로 흘러내려 손만 끈적이며 끝났답니다.


시간이 흘러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커피를 종류별로 시도해 보고 있을 때였어요. 처음엔 쓴맛이 싫어서 라떼, 아인슈페너로 시작했지만, 돌고 돌아 이제는 차가운 ‘아아’로 하루를 여는 심심한 사회인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카페에서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가장 많이 마시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왜 어른이 될수록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실까?’


그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어요. 가장 깔끔하고, 담백하니까요. 점심에 어떤 메뉴를 먹었던, 곁들여 먹는 케이크나 빵이 무엇이 됐든 지나치게 배가 부르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조화로우니까요.


그즈음에는 제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이별의 아픔과 슬픔, 좀 더 진솔하지 못했던 나날들에 대한 후회, 그리고 또 같은 실수를 몇 번 더 반복하고 다짐하기를 여러 번 거쳤어요.


그리고 비로소 최근에 들어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더 이상 잘 꾸며지고 예쁜 모습만을 보여주는 사랑이 아닌, 조금은 내려놓더라도 진짜 내 모습을 지키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랑, 손에 쥔 프라페가 언제 녹아내릴지 몰라 안절부절하기보단 무난하지만 고요하고 안정감 있는, 아메리카노 같은 사랑도 사랑이구나. 그리고 그런 사랑을 위해선 다른 좋은 사람을 찾거나 찾아오길 바라기보단, 스스로가 풍미가 깊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싶었어요.


남에게 담백하고 편안한 사람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관계에서도 완벽주의였던 저는 늘 뭔가 애를 썼던 터라, 자꾸만 나쁜 습관이 비집고 나왔어요. 그래도 조금씩 노력했어요. 내 기분을 앞세운 것이 아닌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혼자 생각을 단정 짓지 않는 그런 사소한 것들요.


무엇보다 내가 믿는 상대방에게 때로는 마음 놓고 의지하는 법도 조금씩 연습해 갔답니다. 물론 아직도 모든 걸 깨친 사랑의 고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마음 상태는 예전보다 더 편안하고 건강함에 도달한 것 같아요.


언젠가 에스프레소를 도전해 본 적이 있어요. 겉으로 보기엔 얼마나 쓴지 감이 잘 안 오는데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을 탁! 치는 엄청난 농도에 깜짝 놀랐어요. 신선한 충격이었거든요. 작은 잔 속에 진짜 힘을 숨긴 에스프레소의 묘한 매력에 그날을 두고두고 기억 중이에요.


 그래서 이제는 삼삼한 아메리카노를 거쳐서, 그런 쓴 경험 뒤에 더 깊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그리고 그날이 오면, 어느 날 갑자기 편안함에 이르렀을 때처럼 일상에서 문득 알아차릴 것 같아요. 한층 더 성숙하고 짙어진 사랑을 하고 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있구나- 하면서요.

매거진의 이전글 미사여구 좀 쓰면 뭐가 어때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