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 님! 여기 계정이 콘텐츠 만들 때 참고하기 좋아요." 같은 팀원이었던 해빈 언니(당시엔 해빈 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베일 듯이 네모 반듯한 업무 메신저들 가운데, 언니의 메시지에서는 유일하게 동그란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 점 때문인지,나는 최종 컨펌 전 언니를 자주 찾았다. 메일 내용, 콘텐츠의 상세 문구, 기획안 등 2% 부족한 내 작업물은 언니의 피드백만 거치면 거의 완벽하게 메꿔졌다. 언니만의 어떤 ‘세련된’ 포인트가 있었다. 나는 그런 섬세함을 발톱만큼이라도 따라가고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또, 마음이 급해지면 말이 길어지거나 의미가 불명확해지는 습관도 고쳐나갔다. 필요한 의견만 전하되 너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풀어갈 수 있는 노하우를 언니도 모르게 내가 체득하게끔 도와준 것이다.
해빈 언니의 남다른 감각과 글솜씨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가장 닮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얼른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평소에도 굳이 더 장난을 치거나 말을 걸며 다가갔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언니로서는 대놓고 E스러운 내 접근 방식이 어쩌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내가 ‘그냥 살짝 또라이’임이 밝혀졌고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수현 님, 이유미 작가님의 <카피 쓰는 법> 추천해 드릴게요!" 올해 1월, 업무 중 카피라이팅으로 고민하던 나에게 도착한 언니의 메시지였다. 사실 퇴근 후 업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나온 내용이라, 언니는 그저 가볍게 참고 도서를 알려 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축제의 장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나와 결이 비슷한 책 추천을 받아보고 그와 관련된 양질의 대화까지 나눈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지적 욕구와 배움에 대한 자극 때문인지, 나는 적잖이 흥분해서 빠르게 책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카피라이팅'과 '문장 수집'이라는 새로운 탐구 영역에 발을 들였다.
머지않아 언니가 퇴사하게 되었을 때, 언니는 나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채소가 큼지막하게 인쇄된 엽서 카드에 편지를 써서 줬다. 나는 양배추 카드였고, ‘쓰린 위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료’라는 의미에 골랐다는 문장을 보며 왈칵 감동을 받았다. "수현 님, 메모해 놓은 글을 따로 인스타 계정에 적어 보는 건 어때요?" 언젠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서 언니가 해 준 말이었는데, 나는 기억해 두었다가 며칠 뒤 글쓰기용 계정을 따로 만들었다. 이렇게 언니는 가족을 제외하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 나를 가장 많이 움직이게 하며, 내가 관심 있어하고 잘하는 분야를 북돋아 주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회사를 떠난 다니, 나는 섭섭함과 언니의 앞날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새로 만든 계정에 양배추 엽서 사진을 올렸다.
언니에게서 받은 두 번째 영감은 7월의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나는 퇴사 직후였고 언니도 새 회사에서 바쁜 하루를 이어가던 와중이었다. 역삼역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입가심을 하며 우리는 또 책과 글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에게 첫 단편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했더니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나중에 사인을 부탁한다고 했다. 이어서 언니도 마음속에 꾹꾹 담아 놨던 해보고 싶은 일을 말해주었는데, 그 일이 진심으로 언니와 잘 어울려서 얼른 이루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알게 된 건, 우리 둘 다 평범하면서도 외롭고 팍팍한 일상을 헤쳐 나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 희망과 위로의 키워드는 꼭 쥐고 있었다. 대화의 말미 즈음에 언니가 ‘이슬아 작가’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역시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작가님의 책 <끝내주는 인생>을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 이 날은 내가 브런치 작가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 한 번의 계절이 바뀌고, 11월 마지막 날에 언니를 만났다. 사당역 근처의 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교환하기로 한 책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물었고, 안부를 나눴다. 언니는 여전히 바쁘지만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였고, 나도 그동안 꾸준히 글을 쓰며 심신의 안정을 유지 중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싶을 정도로 댐이 터지듯 글을 써 내려갔다. 그 글들로 온 가족이 즐겁게 대화하거나 동생에게 진심을 전하기도 했으며, 엄마와 함께 울며 서로의 상처를 돌봤다. 또, 돌아가신 할머니께 쓴 편지로 뒤늦은 안부를 전하기도 했으며, 가까운 지인들로부터는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말 그대로 글의 힘을 온 피부로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글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날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시작점에는 해빈 언니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언니에게 하나 하나 해주었더니, 자신이 그런 큰 영향을 끼친 줄 전혀 몰랐다며 놀랐다. 그렇지만 언니답게, 내 성장 속도가 워낙 빠른 거라며 나에게 그 몫을 돌렸다. 그런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유쾌하게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저는 연말마다 올해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들을 테마별로 떠올려 보거든요? 언니는 ‘2023년, 김수현에게 가장 영감을 많이 준 사람 1위’에요. 시상식 상상하면서 언니 별명도 만들었잖아요.”
“정말? 뭔데?!”
“오드리 ‘햅빈‘이요! 진짜 잘 어울리죠? 올블랙 드레스 입은 느낌이에요!”
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살면서 이런 별명은 처음인데 너무 좋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작은 맥주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7월에 나눴던 대화처럼 내 이름이 적힌 책에 사인을 하게 되었다. 사실 만들어 놓은 사인이 없어서 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썼는데, 이걸 계기로 앞으로도 내 사인은 편지가 될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무래도 언니에 대한 이야기는 꼭 글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하며 언니의 "다음엔 <랩걸> 교환식이 있겠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답을 남겼다.
"좋아요! 저는 김초엽 작가님 책으로 데리고 나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