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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Jan 11. 2021

1월 1주 차

갈구하다 : 간절히 바라며 구하다.

안녕하세요, 문화 생활자 상구입니다. 

브런치가 되어 참 감사합니다. 새해부터 시작이 참 좋네요. 


글을 읽을 독자분들께 일주일에 최소한 한 편의 글을 올릴 것입니다. 매주 한 단어를 갖고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를 재밌게 읽어주세요, 함께 첨부되는 사진은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 역시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정기적인 글 외에도 일기, 단상 등 글도 준비 중이니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모두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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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구에 담긴 ‘간절함’은 마치 승리를 염원했던 2002년 붉은 악마의 ‘꿈은 이루어진다’를 연상시킨다. 그렇기에 갈구한다는 것은 꿈과 이어진다. 어릴 적 장래희망들에 대한 나열의 면면을 살펴보면, 꿈은 아니었다. 꿈은 간절함을 담기 마련인데 종이 속 장래희망들은 떼쟁이 아이의 한 순간 칭얼댐에 그쳤기 때문이다. 금방 잊어질 그런 꿈.


 스스로를 돌아볼 때 생각을 비로소 언제 했나 싶으면 학창 시절까지 땅 속에 있던 씨앗들이 20살이라는 조건을 갖추고서야 발아했다 생각한다. 장래희망에 가리어진 베일을 하나 둘 벗고, 벗고서야 그토록 찾던 내 갈망의 본질을 찾게 되었다. 모험.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싶다. 그래서 그 꿈만이 내 미래라고 생각하고, 믿으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고 있다. 꿈과 다소 동 떨어져 보이는 현재 역시 꿈의 일부일지 모르겠다. 과정과 결과만이 조명받아도 준비 역시 내 꿈의 헛헛한 무언가를 채워주니 말이다.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내 꿈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지금 이를 견뎌낼 수 있는 것 또한 꿈에 담긴 간절함 덕분이다.


 갈구와 꿈이 가져다주는 어감에 거리가 있다. 둘은 교집하는 것이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갈구는 지금 당장과 더 가까워 보인다. 현재의 갈구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른'이라는 타이틀의 조건이 떠오른다. 사람마다 어른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햇수로는 25,27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어른 자격을 얻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감히 스스로 어른이라 칭하기 위해서는 다소 같잖은 학교 모임에서의 역할에 대한 책임을 넘어 나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돈을 벌고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완수하는 수준이라면 그는 프로다. 어른은 그 이상으로, 삶을 스스로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갈구가 이것이다. 스스로 살아내는 것.


 ‘살다’에서 출발했어도 살게 되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살게 되는 것에는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살면서 늘 경계하는 것이 결여된 주체성이다. 마음이 없거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경계한다. 살게 되는 것에는 갈구가, 간절함이 묻어있지 않다. 매일을 기록한다는 일기에서 그런 간절한 향수가 나지 않을 때는 하루를 살게 된 것만 같아 괴로워한다. 그럴 때마다 매일을 간절하게 살아내는 것은 나에게 가능한 일일까 의문이다. 살아낸다고 해도 한 번 하루를 살게 되면 스스로 다그쳐 다시 살아내자고 다짐하지만, 불규칙적으로 살아냄과 살게 됨의 굴레를 달리는 내 삶의 저주스러운 반복성을 마주하게 된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망각과 반복이 있음을 느끼며 불가능함의 뼈저린 현실을 깨닫곤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어느새 나의 갈구는 또다시 꿈으로 변했으며 이 꿈은 이루기 전 이미 망가져 있는 것을 본다. 한 번도 죄를 짓지 않던 이가 한 번의 죄로 죄인 낙인을 떼지 못하는데, 수 차례 망가져버린 나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갈색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내 눈의 동공이 갈구함으로 가장 컸던 그때는 언제였을까? 좋지 못한 나의 시력은 사실 간절함을 잃은 것은 아닐까. 나는 안경에 기대 그저 편하게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닐까. 요즘은 안경을 잘 쓰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내 앞을 오롯이 바라보기 시작하자 앞이 보이고 동공이 커지는 것만 같다. 언젠가 내 눈의 동공은 컸지만 지금이 내 동공이 가장 크게 염원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후에 되묻는다. 너의 눈은 언제 불탔는지. 질문을 받는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내가 가장 불타오른다고 말하고 싶다.


 긴 마음과 생각의 바구니를 비워내니 갈구에 대한 나의 감정이 선명하다. 갈구를 갈구한다. 갈구하는 나를 갈구한다. 내가 간절하기 바라는 이 마음에서 갈구에 대한 내 마음이 동경의 대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갈구의 불씨가 꺼지는 날은 짓밟혀 버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타올라 더 이상 탈 것이 없는 날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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