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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Feb 16. 2021

2월 1주 차

구하다 : 필요한 것을 찾다. 또는 그렇게 하여 얻다.

평가는 상대적인 인내 속에서 내려야 한다. 후에 돌아보니 나의 선택들이 옳았거나, 나는 잘 살아왔구나 같은 미시적인 것부터 공산주의나 군주제는 실패했다와 같은 거시적인 것까지. 아직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평가하는 것은 기준에 따라 그릇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기준을 들이대며 평가해도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불변의 답이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평가에 확실함이 결여돼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존재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한 없이 추하기도 하다. 숲 속의 벌거벗은 한 인간은 아름다워 사슴처럼 뛰고, 새처럼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며, 바람처럼 자유하지만, 도시 속 벌거벗은 한 인간은 정신병자로 언덕 위 하얀 집에 갇혀 교정받는다. 인간은 모여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본다. 나는 또, 다른 너를 보고 그도 나를 본다. 이렇게 어우러져 살아감 속에 나 vs 너라는 비교 지점이 자란다. 개인은 이런 비교 지점을 만들고 사회는 이를 기초로 틀을 만든다. 틀은 너를 보며 느끼는 나의 불완전을 부분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수단이다. 벌거벗은 인간이 정신병원에 갇히는 것도 사회의 틀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틀보다 인간이 먼저였지만, 틀이 형성된 후로는 틀 안의 인간으로 전락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틀 안의 삶은 안정성을 갖지만, 어느 곳은 부패해버리곤 한다. ‘실패’에 한 발 다가간 것이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비교의 인간이 만든 틀의 최후다.
 의식적, 무의식적 비교는 각 개인과 사회가 끝없이 발전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개인, 사회, 틀의 역사 속에서 내가 자랐고, 나 역시 비교에서 비롯된 끝없는 구함의 역사를 갖고 있다. 어떤 성격을 배우고, 나의 본래 성격을 버리고, 학벌을 위해 공부를 하고, 남들 위에 있기 위해 또 공부하고(물론 남들 위에 서 본 적은 없다.). 그런 삶이 어느 순간 피곤하게 느껴진 때가 있었다. 과거에는 무감했던 물이 고였음을 느끼고 악취를 견디는 것이 더는 힘들어진 날이 왔다. 비교하며 그 속에서 느낀 부족함을 채우려 했지만, 그 채움의 소용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관습이 사라지거나, 고쳐지지 않아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멀어져 한 개인으로 나는 무엇인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나인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나 의미인지 의문이 생겼다.
 증오감. 구하다에 갖는 나의 첫 번째 감정은 증오다. 인간에 대한 실망에 ‘결국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 일까’ 같은 나에 대한 실망이 더해져 나를 미워한다. 나는 한 개인일 뿐인데 어째서 틀에 갇혀 끝 모르게 비교하는지 스스로에 원망과 증오가 생긴다. 이렇게 경멸감을 느끼고 또 반복적으로 인간적인 추를 드러낼 때면 나라는 개인을 포기하고 틀 안의 인간 1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싶은 무력감도 느낀다. 세상이나 사회는 나의 지금까지의 일탈을 봐줄 테니 한 자아의 존립성을 버리고 패배를 인정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를 생각해 순교한 선교사들처럼 나 개인으로 끝까지 존재할 것인지, 민족의 변절자처럼 나를 배신하고, 포기할 것인지 추를 의식할 때마다 느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여도 스스로 뜻깊다면 가치를 지닌다고 믿기 때문에 아직은 그 고민 앞에서 지치지 않고 다시, 또다시 벗어나고 있다.
 넘어질 때마다 늘 이런 긍정성을 갖고 일어서지는 못한다. 너무 자주 넘어지다 보면 스스로에 안쓰러움과 동정심이 생긴다. ‘이렇게 많이 걸리고 또 하네.’, ‘이렇게 많이 했는데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네.”라며 안쓰러워한다. 내 삶이 왜 이런 것인지 불쌍하다. 언제까지 ‘언젠가 빛 볼 날이 온다.’는 말을 믿으며 또 구하며 살아야 하나 싶은 그런 마음이다. 물론 내 안의 아무도 감히 ‘그쯤 하면 충분하다’며 ‘이제 놔주라고’ 하지 않으며, 세포 하나하나 안쓰러워하는 것이 한 편으로는 응원처럼 느껴져 다시 도전할 힘이 된다.
 나만 이런 저주스러운 안쓰러움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조명했지만 나와 함께 걸어갈 ‘단어’도 있다.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평생 간다고, 사람이 죽어도 단어는 평생 산다. 나보다도 더 악독한 저주에 빠져 내가 삶이 멈춰 구함의 굴레에서 벗어나도 단어는 또 다른 이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끝 모를 집착적 충족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영생 속에서 끝없는 결핍을 느껴야 하니 내가 안쓰러워봤자 ‘구하다’만 못하다. 오히려 한 번은 꼭 안고 고생이라고, 힘내라 위로하고 싶어 지는 그런 단어다. 나와 함께하지만 나보다 더 갈 그런 단어가 ‘구하다’이다.
 끝을 의미하는 단어나 표현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구하다 외에도 끝이 모잘라 아직 부족함을 드러내는 단어가 많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단어는 채우는 중이거나 빈자리가 있는 단어다.’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전부가 아니다. ‘단어’는 아직 문장이 아니다 ‘채우다’ 역시 진행 중이며, ‘중’ 역시 마찬가지다. ‘빈자리’는 부재가 드러나며, ‘있다’만이 유일한 끝에 도달한 그런 단어다. 이처럼 끝없이 채우려는 이의 입에서는 채우려는 말이 나올 뿐이다. 우리 사회가 각 개인을 끝없는 채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드는만큼 우리 역시 입에서 채움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는 단어를 뱉는 것은 아닌가 싶다.
 구하다에 갖는 기대는 ‘구함(Save)에 대한 구함(Get)’이다. 나에게 의미를 갖는 구하다(Save)는 내가 잘 되는 것 좋고 중요하지만 함께 잘되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조금 더 나아가 나라는 개인의 작은 구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도 구함(Save)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바람이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니, 사회 속에서 각 개인으로 존립해 추가 아닌 아름다움만을 뽐내고 살아가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구함(Save)에 대한 ‘구함(Get)’에서 또 한 번 무력감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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