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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Mar 29. 2021

3월 3주 차

깨닫다 :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깨닫는 것은 자신을 부수는 일이다. 다시, 고착화된 자신을 깎는 것이다.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생각을 부숴 새로 만든 내가 되는 것이다. 깨닫고 깨달아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어질 때는 진리의 보석을 손안에 넣고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과장하면 삶을 산다는 것은 매 순간의 나를 깎고 깎아 진리를 향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리를 향함은 인지의 유무와 무관한 본능이다. 깨달음은 스스로 또 타인에 의해 삶 속에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인간은 더 나아지고 싶은 욕구를 지녔기에! 끝 모르게 진보하고 채우기 위해 부족을 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친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런 불완전이 완전해지기위해 끝 모르게 발버둥 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불완전한 존재(인간)가 완전한 존재(신)가 되기 위해 끝 모를 탐욕을 부르는 것은 태초에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내려진 인간을 향한 저주의 반증이다.


 깨달음에는 때가 없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깨닫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이 진행되는 와중에 혹은 일이 끝나고서 깨닫기도 한다. 시기는 달라도 본질은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니 인간이 멈추지 못하고 빠르든, 느리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부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 인간이기에 진보하는 것이다. 다시, 진보하지 않는 이나 진보하지 않으려는 이는 없으며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죽었을 것이다.


 인간의 출발은 자연이다. 본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자라다 독립한다며 인간 사회라는 틀 속에 넣어 구분 짓는가 하면 완전한 분리는 없이 더불어 살아간다. 깨닫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사회는 자연과의 동행이 필연임을 이야기하며 자연을 끌어들이거나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오감의 깨어있음은 외부 자극에 끝없이 반응하고 받아들여 미처 몰랐던 그 무엇을 느끼게 함이고, 자연과의 분리가 삶의 출발인 지금 세대는 인간이 자연과 함께해야 함을 깨달았다.


 세상의 돌아감과는 별개로 인간은 깨닫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움직임과 무관하게 세상은 알아서 돌아가고 있으니 잠시 세상을 잊고 본질,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1차적으로 자연을 벗어나 살지 못하며, 혼자서 살 수 없고 인간과 어울려 살아간다. 인간 도시가 자연과는 동떨어진 곳이라는 생각이 깊게 박혀 있을지라도 실상은 자연에 일거수일투족 매여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면 우산을 쓰며, 추우면 옷을 더 입는 등.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거나 또는 자연과 무관하게 살 수 없고, 동행하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우리가 스스로를 높여 동행이지 사실은 자연 아래 사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또 인간과 어울리기 위해서도 인간은 돌아봐야 하는데, 예를 들어 사람 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인간은 알아야 한다. 한두 번은 인간 도리에서 어긋남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긋지는 않지만, 깨달음 없는 무지의 언행이 거듭될수록 사회는 밀어낸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 살 수는 없는 법이기에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깨달아야 한다.


 인생은 나그네 길 걷기라는 말이 있다. 나그네는 방랑자로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며, 우리 삶은 정말 그러하다. 학교를 가고, 직장을 가고, 여행을 가는 등 끝없는 새로움을 마주하며 또 새로운 이를 만난다. 새로운 풍경, 문화, 가치관, 생각 등 수많은 다양함을 경험하며 매일매일 새로움 속에서 인간은 깨닫는다. 인생에 관한 또 다른 비유로 마라톤과 같다고도 한다. 긴 레이스, 그 안의 희로애락. 과정에서의 발견과 깨달음. 거듭 또 거듭해 깨닫는 것이 마라톤이고 인생이다. 희속에, 노속에, 애속에 또 락속에 깨달음을 반복해 얻고서 경주를(삶을) 마치는 것이다. 모든 것의 끝에 깨달음이 있다.


 삶의 끝에 진리는 반짝이고 있을까. 과학은 우리의 눈을 더 넓여 많은 것을 알고 깨닫게 해 주었지만, 여전히 우리 눈에는 뒤통수가 없다. 과학은 궁금한 게 여전히 많다. 과학이 보지 못하는 것을 되려 우리는 삶 속에서 깨닫곤 한다. 진리는 숨결 같아서 늘 내 안에 있음에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비 온 직후 빛에 굴절된 무지개가 피는 것처럼 죽음의 문턱을 넘을 때 내 안에 기다리던 진리도 알맞게 나와, 영롱함을 빛내며 나를 즐겁게 해 줄까. 

죽음은 종착지일까, 환승하는 곳일까. 진리를 알게 된 끝에 다다른 이에게 삶이란 없으며 평생을 바라던 진리만 두 손에 꽉 품은 채 그 마지막 욕심으로 마침내 얻은 소중함을 절대 놓지 않겠다며 그대로 굳는 것은 아닐까. 언제가 될지 모를 삶의 끝에 대한 궁금함은 넘치지만 마지막에 이를 그때까지 깨야할 껍질은 아무도 알 수 없어 이번이 마지막 껍질이라는 생각으로 또 깨달을 수밖에 없다.


 과연 깨닫는다는 것은 좋은 걸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본능을 느껴도 그 본능에 의문을 표하고 더 나아가 억제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으로 진리를 향해 생에 걸쳐 나아간다면 진리는 무엇을 위함일까. 죽기 전까지 진리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지금 진리를 향하는 것이, 계속 스스로 깨짐을 경험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의문을 표한다. 깨닫는 것은 과연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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