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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abica Duck Jul 19. 2021

6월3주 차

보다 : 눈으로 대상을 즐기거나 감상하다

이번 주는 꼭 한 편 더 올릴 생각입니다!!




 눈을 뜨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눈 감아도 세상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도 나의 생각의 씨앗은 빛 없이 자라 하나의 작품이 되어 스스로 어둠 속에서 빛나 눈 감은 세상을 채워준다. 상상력은 눈을 뜨든 감든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수경을 쓰고 수영을 시작하면 화면 전환이 빠르다. 그 순간순간 짧게 숨을 들이쉬고 참고, 한쪽 팔씩 번갈아 움직이고, 발은 물장구를 치며 나아가는 모습. 순간이기에 내가 보는 것이 보는 것 같지 않고, 끝에 다다라 쉬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햇빛에 물이 반사되어 눈 찡그릴 때는 물에 비쳐 굴절되어 다리가 짧고, 굵게 보이거나 보이는 것 같은 오해를 줘 물 안의 사람은 또 찡그린 채로 밖에서 바라보는 이를 바라보기도 한다. 수영장보다 불투명한 바닷가에서는 모래들이 자신을 밟아 안마시켜달라며 아우성이고 그 위로 발이 파묻힐 때면 좋다며 덕지덕지 붙기도 한다. 한 번 파도쳐 무릎까지 훑고 지나가면 붙어 있던 모래들은 그들의 언어로 씻겨나가며 소리친다. 다이빙하기 위해 절벽에 서 있는 이의 자세는 프로다. 왠지 만화처럼 회전하면서 물속으로 떨어지고는 머리를 하늘로 치켜세우면 긴 머리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을 뿌린다. 비 내린 자리 무지개 나타나듯 물방울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작은 무지개들이 피어있다. 뱃고동 소리에 미어캣 마냥 고개를 돌리고는 출항하는 배의 관심 끌기임을 알고는 이내 다시 물장구치는 사람들,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는 같이 노는 아빠에 의지하고 잠시 잠수하면 세상에 홀로 남은 것 같은 얼굴로 울려고 한다. 다시 나타난 아빠는 네스호의 괴물 같지만 아이에게는 구명조끼보다 믿음직한 존재다.


 산 앞의 인간은 인간 앞의 개미보다 작다. 개미가 작아도 인간을 물면 따갑듯 인간이 작아도 산을 오르면 간지럽다. 산사태는 간지러운 비에 산이 온몸을 흔들어 간지러움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산은 손 마저 굳어 바위에 서서 사진 찍는 사람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같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지만 부처님이 그러하듯 산은 그 손을 움켜쥐지 않는 아량을 지녔다. 아니 산이 그러하듯 부처님도 그러한 것이겠다. 정상은 가장 높은 곳으로 안개가 둘러싼 산은 모자를 쓴 것 같이 넓은 챙이 아래를 가려버린다. 산타는 사람은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하를 손에 쥔 기분을 느끼며 포즈를 취하기 마련이건만 아래가 보이지 않으면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 혹은 만화에나 보는 하늘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구름 밟으며 뛰어가는 것은 미치거나 죽은 것일 것이다. 구름 밟아보려 발 내딛는 것은 끝난 줄 알았던 계단이 하나 더 있어 쓱 빠져버리는 철렁임과 함께 현실로 정신을 데리고 온다. 정상에서 먹는 김밥은 달다. 김밥 집 사장님은 어디서 그런 소스를 얻었는지 정상의 김밥 중 달지 않은 김밥은 없다.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니던 심마니처럼 김밥집 사장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절벽은 아찔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길은 편한 길이다. 인생은 가시가 듬성듬성 있어 어느 때나 불쾌하고 불편한 시기가 있지만 죽음으로의 직행 길은 목 터져라 외친 이후는 더는 고통이 없다. 인생이 길 수록 주마등이 길어질까. 주마등은 평생에 걸쳐 만드는 나의 영화다. 누구나 죽음을 앞에 두고는 마지막 영화를 볼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없던 고대나 중세 시대에도 주마등은 있었을까. 아마 그 주마등을 보고도 살아난 사람이 옳다구나 외치며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뙤약볕에서 걷는 이는 몇 시간은 걸은 것 같이 구부러진 허리와 앞으로 처진 머리, 축 늘어진 팔을 갖고 있다. 신발은 걷기보다 끄는 것에 익숙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나아간다. 앞으로 갈 수 있는 힘이라면 못할 것은 없다. 그 옆에 똑같은 자세로 걷는 이를 보면 안에서 봐도 밖이 덥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지랑이는 익어버린 도로가 지르는 비명이다. 비명이 눈에 보이는 것은, 소리가 눈에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이 마저도 더위를 먹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다. 건조하면 불이 나지만 습하면 짜증이 난다. 달라붙어 살 비비며 걷는 커플은 인내일까 극복일까. 바람이 불면 시원하다 외치는 이는 미친 걸까. 소리 지르며 날뛰는 이는 모든 사람의 염원에 더 달아올라 터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매미는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데 인간은 더위를 이겨버리고 살아있다. 똑같이 소리 질렀지만 매미는 바닥에 떨어져 자연 속에서 부식되는 반면 인간은 덥다며 대자로 누워만 있다. 바람 불면 다가오는 습함에 더운 건지 시원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눈 감고 있을 뿐이다. 잠은 잠시나마 잊게 하니까. 눈 감아 꿈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선 수영장의 시원한 물과 수영 후 찬물로 샤워해 모든 열을 식힐 수 있다. 어쩌면 그 길이 매미와 다르게 인간이 살아남은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꿈은 인간이 갖고 있는 희망 영화소로 늘 원하는 꿈을 상영하지는 않아도 대게 희망을 보여준다. 꿈에 목매달아 사는 인간은 꿈의 힘을 받았기에 쓰러지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을 즐기고 이를 담아둔다. 눈 감으면 담아둔 생각들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글을 쓸 때조차 순간 형성되는 이미지를 따라 글을 쓴다. 이미지다. 나의 글은 이미지들의 연속이다. 내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난 늘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눈앞의 현실도 아름답지만 난 아름다움만 있는 깜깜한 세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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