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뜩이다 : 생각따위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다
번뜩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번뜩이는 사람이고 싶다. 막힌 상황에서 번뜩이는 생각으로 혈로를 뚫어주는 해결사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끙끙거려도 마땅한 묘안을 제시하지 못할 때는 그대로 또 내 재능이 갖고 있는 한계에 한탄하곤 한다.
그런데 번뜩인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이 팍 떠오른 것이다. 나는 왜 번뜩이고 싶은지, 어느 정도 되어야 번뜩인다고 자칭할 수 있는지 그런 기준 말이다. 지긋이 살펴보면 영화나 만화, 주변의 창의적인 인물이 보여주는 번뜩이는 모습이나 지금껏 봐온 이미지들을 망라하는 번뜩이는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렇게 나타난 이미지는 막힐 때마다 머리의 한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하고는 기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비웃음 짓고 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이상적 이미지와 나를 비교해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서 있는 이미지만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번뜩인다는 표현은 비교가 모태가 되는 표현이다. 필연적으로 상대성을 갖고 있어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게 되는 표현이다. 이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면 비교는 가치를 잃는다. 자연히 상대성, 절대성도 가치를 잃게 되고 번뜩임은 가치를 잃어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런데 단어 중에 그 안에 상대성을 내포하지 않은 단어가 있을까? 상대성이 비교에 선행되는 것인지, 비교가 상대성에 선행되는 것인지 의아하다.
단어가 갖고 있는 본질에 주목하면 상대성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단어마다 본질은 다르다. 칸트는 우리가 느끼는 쾌를 이야기할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했다. 쾌 안에는 비교가 없다. 이게 더 즐겁니 저게 더 즐겁니 같은 이야기는 인간이 비교라는 잣대를 들이대 비교적이고, 상대적인 쾌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천재, 똑똑하다, 잘생겼다, 크다 이런 단어들은 번뜩이다와 같이 비교에서 생겨난 단어다. 모두 비교를 본질 삼아 비교의 지표로 상정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내가 번뜩이는 사람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어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내재되어 있다고 믿거나 단어를 잊어야 한다. 비교에서 태어난 단어일지라도 비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번뜩이는 면모는 필연적으로 담고 있지만, 이러나저러나 세상에 나 혼자여도 번뜩이며, 세상 모든 사람은 번뜩인다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세뇌,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는 것에 동정이 가며 못마땅하다면 삶에 비교란 단어를 없이 살아야 한다. 비교가 없으면 비교에서 파생된 그 외의 모든 단어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두 방법 다 삶에서 이루기 쉽지 않다. 세뇌하듯 스스로 되뇌든, 잊고 살든 모두 사회와 연결 고리가 있고, 사람을 대하면 자연히 마음, 머릿속에서 비교의 사다리가 무수히 세워져 내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인처럼 떨어져, 멀어져 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 나도 아직 초입단계이기 때문에 방법은 모른다. 그저 해보자 노력할 뿐이다.
나는 번뜩이는 면모를 갖고 싶고, 번뜩이는 것에는 선망의 눈망울이 내 안에 그을린다. 어둠이 익숙한 이는 어둠을 편히 여기며 빛에 눈 멀 것 같이 찡그리지만, 한 번 빛을 본 이의 뇌리 속에는 그 빛이 영혼의 빛으로 퍼져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손이 된다. 번뜩인다는 찰나의 순간은 유레카라 외치며 달려 나가게 하는 빛을 갖고 있어 무, 흑, 어둠에서 자고 난 사람을 깨우는 불빛은 아닐까. 누구나 번뜩이고 싶으니 말이다. 작가라면 표현을, 화가라면 생각을, 직장인이라면 아이디어를, 학생이라면 답을, 가수라면 가사를,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공은 자신임으로 번뜩이는 그 빛을 자신 안에 담아 멋지게 해내고 싶은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번뜩인다고 믿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