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정말 베프였을까.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안 할래.'
베프와의 이별은 생각보다 쉬웠다.
90년대 노래를 듣고 있으니,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내 베프. 고1 때부터 작년까지 23년 지기.
종종 생각나고 불편한 마음 애써 지웠는데 오늘은 글로써 마음 정리 해보련다.
"미선아, 네가 내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어줬어."
J의 한마디로 우리는 베프가 되었다.
서로 다른 중학교에 다녔던 J는 당시 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고1이 된 후 J는 나와 친구가 되었고, 우린 운이 좋게도 고등학생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J는 나 외에 다른 친구와도 잘 지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내게 그랬다.
"미선아, 네가 J를 시녀 부리듯 한다고 J가 속상해하더라."
깜짝 놀랐다.
"네가 J한테 버스 하차벨 누르라고 시키고 그랬다던데?"
그야 당연히 J가 벨에 가까이 있으면 눌러 달라고 했을 건데, 그게 뭐 잘못된 건가. 내가 말투가 좀 명령조였나 싶었다. 친구 사이에서 편하게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시녀라니! 말 표현이 너무 심하잖아!
내 얘기를 뒤에서 다른 친구에게 했다는 게 불쾌했다. 게다가 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이미 J보다 더 오랜 내 중학교 친구라 나를 모르진 않을 텐데, J 얘기만 듣고 나를 나쁘게 보는 것도 속상했다. 나는 J에게 별 얘기 안 했다. 평상시랑 똑같이 내게 웃으며 다가오는 J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또 다른 친구도 어느 순간 내게 이유 없이 적대적이었다. 그 친구는 J 짝꿍이었다. 대충 느낌이 왔다. 그런데 나는 그냥 또 넘겼다.
당시 나는 가깝게 잘 지내는 친구들이 많아서, 굳이 문제를 들추어내는데 신경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J에 대한 마음은 조금씩 멀어졌으나 우린 여전히 친구였다. 틈만 나면 J는 "우리는 베프잖아"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도 '그래 우리 베프지'라고 나 자신을 상기시켰다.
20대에 J랑 연락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 인연은 끝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 호주에 살고 있는 친구 현이에게 연락이 왔다.
"J가 네 연락처 알려달래. 얼마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는데 네가 너무 보고 싶대. 알려줘?"
J와 오랜만에 만났다.
"내가 수술받을 때 얼마나 네 생각이 났는 줄 알아? 너무 힘드니까 네가 떠오르고 보고 싶었어.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진짜 소중한 거잖아."
미안했다. J가 힘들 때 내가 옆에 있어주질 못해서. 그렇게 우린 다시 베프가 되었다. J는 종종 힘들 때면 내게 전화해서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J가 호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호주에 살고 있는 현이도 만나고 도움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실 현이는 J를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에 J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꽤 많았다. 나는 현이에게, J가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고 너에게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으니, 이 좋은 기회에 한번 만나서 잘 풀어보라고 했다.
며칠 후 J와 현이가 호주에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왔다. 둘이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현이에게서 단 한 번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
J를 만났을 때 현이에게 연락이 오냐고 물었다. 연락이 온다고 했다. 나에게는 연락이 갑자기 안 오는데, 무슨 얘기 나온 거 없었냐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또 있었구나 싶었다.
나 역시 현이에게 먼저 연락 안 했다. 내가 잘못한 거 전혀 없고 이렇게 잘 지내다가, 설사 J가 나를 나쁘게 얘기했다 해도 우리 사이 신뢰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에 너무 실망했다. 현이가 호주로 유학 갈 때 그렇게 울고 불고, 꾸준히 연락하며 20년 가까이 이어온 사이다. 한 순간에 이렇게 변할 거라면, 나도 굳이 잡고 싶지는 않았다.
왜 J와 연결된 친구들과 다 멀어졌을까.
J와는 연결되지 않은 나와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슬쩍 그 친구에게 J와 있었던 얘기를 해보았다.
"J가 뒤에서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 학창 시절 일을 30대가 되어서야 처음 꺼내봤다.
"그러게 내가 걔 별로라고 했지!"
예전에 지나가듯 J 별로인 것 같다고 내게 말한 적은 있었다. 그 친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
더 이상 서로 말을 잇지 않았다. 말 안 해도 다 설명이 되었으니까.
이후 가끔 J를 만났고 처음으로 물어봤다. 혹시 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한 적이 있느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말도 안 된다고 J는 말했다.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고, 꽤 늦게 결혼한 J도 임신을 했다. 코로나이기도 했고 서로가 너무 바빠서 한참을 못 보다가 J의 출산 한 달 전쯤 겨우 약속을 잡았다.
약속 열흘 전, 내가 미안하다고 취소했다. 내가 준비하던 시험이 있었는데, 하필 친구와 만나기로 한 그날인 거다. 그날이 아니면 한 달 후에 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고민하다가 나는 한 번 이기적인 결정을 하기로 했다.
미안하다면서 상황 설명하고 약속을 취소했다. 친구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내가 몇 번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만삭이고 예민해져 있을 때다. 힘들게 잡은 약속을 내 개인 사정으로 취소했으니 화가 날만 했다. 친구는 전화받을 상황 아니라고 바쁘다고 카톡만 몇 번 보내왔다. 그리고 며칠 후 "언제 통화라도 하자"라고 카톡이 왔다.
'전화 안 받을 땐 언제고 이제야 통화하자고?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안 할래.'
그렇게 친구의 출산을 앞두고 나는 우리 인연 끝내기로 했다. 단지 이번 사건 때문만이 아니었다.
'베프'라는 명목으로 20년 넘게 좋은 것만 보려고 끌고 온 질긴 인연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끝났다. 참 허무하게도 생각보다 쉬웠다.
우리 우정의 수명은 23년이었다. 무조건 오래된 관계가 깊어지는 건 아니다. 늘 불편했던 마음 한구석이 한결 가벼워졌다.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는 때로는 멈추고 비울 필요가 있는 법이다.
* 그림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