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제 발 저려서.
아침 5시 40분 눈을 떴다.
어제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 이럼 안되는데.'
오랜만이다. 전날 매듭짓지 못한 감정이 다음날까지 이어진 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어떤 단어와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 팠을 뿐이었다. 상대가 나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다른 이에게로 날아가던 화살이 내 가슴에 꽂혔다.
카톡방에서 글을 보자마자, "이거 내 얘기하는 거구나"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는데, 꼭 나한테 말하는 것 같았다. 도둑이 제 발 저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매일 글쓰기 챌린지에 참여하고 있다. 어제는 주제가 '내가 싫어하는 30가지 적기'였다.
벌레, 어질러진 것, 냄새 등 사물이나 어떤 형태만 적기에는 잘 생각이 안 났다. 나대는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나를 공격하는 사람 등...
싫어하는 '것' 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쉽게 떠올랐다.
'근데,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에 멈칫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타인에게는 '내가 그런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록을 적으며 나야말로 조심해야지 했다.
사람이 한 가지 모습일 수만은 없을 거다. 대부분 양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무뚝뚝하지만 잘 챙겨주는 따뜻함이 있을 수 있고, 늘 웃는 표정과 친절함이 몸에 베어 있지만 험담하기 좋아할 수도 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좋고 싫은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행동이 싫다고 해야 맞는 말일 거다. 물론 행동 때문에 그 사람이 좋고 싫어지는 거겠지만.
일명 '바른말 잘하는 사람'이 있다. 난 그런 사람이 솔직하고 맞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 까지는 그랬다.
사회생활로 상처받고 힘든 일 겪고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면서,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들 틀린 걸 모를까. 눈앞에 보인 현상만 보고 지적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것까지 생각하면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알면서 모른 척하기도 하고, 또 다른 행동으로 상황을 바꿔보기도 했다. 고개를 꼿꼿이 들다가도 숙일 줄 알아야 하며,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지켜볼 줄도 알아야 했다.
바쁜 와중에 카톡이 여러 번 울렸다. 들여다보니 지인이 가까운 사람에게 오타 지적을 많이 받아 속상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속상했던 지인이 상대방을 두고 표현한 말 한마디를 읽자마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꼭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았다. 평소 나도 오타를 종종 얘기했었던 탓이다.
원래 사이좋고 서로에게 좋은 말들만 듬뿍 하는 사이라서, '이거 내 얘기한 거냐'라고 농담 한마디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 날은 달랐다.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나를 지탱하던 멘탈은 바닥을 치고 올라오질 못했다. 점점 성장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발전은 없고 제자리걸음인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내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는 건 진정 기쁜 일이다. 반대로 내 허물, 내 잘못을 타인이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발견했다면 부끄러운 느낌일 테다. 아니 이미 상대방은 느꼈는데, 내가 그걸 눈치 못 채고 잘못된 행동을 계속 반복했다면... 감정이 소용돌이치면서 내가 그동안 쉽게 뱉어냈던 여러 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냥 나 혼자 낯뜨거웠다.
말과 행동에 무게가 있어야 함에도, 긴장하지 않으면 쉬이 가벼워진다. 물론 어떤 말이든 편하게 툭 터놓고 있는 관계 안에서는 예외겠지만, 그 안에서도 때로는 말 한마디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내 감정과 생각을 적합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데 거기서 오류가 생기는 거다. 디테일한 감정을 몇 글자로 표현하는 게 한계가 있다. 몇 글자에서 느끼는 미세한 감정 온도 차이, 이게 쌓이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거다.
참 어렵다. 어떤 말들은 내 마음을 춤추게 하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나 역시 상대방에게 좋은 말들만 해주고 싶다. 편하게 내 속마음 툭 터놓다가도 멈칫하게 된다. 나이 먹으니 더 조심스럽다. 인연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잘 아는 나이가 돼서,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스럽다. 계속 함께 하고 싶어서.
가해자는 없는데 나 혼자 상처받고 쥐구멍 찾아 들어왔다. 잠을 자고 하루가 지나도 아직 제자리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