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친구, 평생친구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내 주위에는 늘 친구가 많았다. 무리 지어 다녀 많기도 했지만 각각의 친구들과 교류도 많이 했다. 내가 활발하고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서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차분한 편이었고 평범했지만, 나를 좋아해 주는 친구는 많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친구마다 그들만이 가진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진실되게 대해줘서 그랬던 걸까 싶다.
내 생일날, 선물을 잔뜩 받았다. 우리 반뿐만 아니라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까지 모두 선물을 주다 보니, 나 혼자 그 많은 선물들을 들고 집에 가져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4절지에 그림과 깨알같이 적은 편지, 직접 구운 쿠키 등 특별한 선물이 많았다. 나는 그렇게 정성 들여 선물을 준 적이 없는데 받은 게 많아서 감동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반장이 내게 그랬다. "윤미선 연예인이야?"
친구가 많은 게 늘 좋지많은 않았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많아지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누군가는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거나 토라졌다.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 내게 기대하는 바를 내가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내가 관심 갖아줄 친구가 많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누군가를 서운하게 만드는 상황이 생겼다.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다. 두루두루 적당히 관계하려면 조절이 필요하겠구나를 뒤늦게 깨달았다.
30대 초 회사를 창업하고 운영하면서 굉장히 힘든 날들을 보냈다. 내가 벌린 일을 문제없이 잘 이끌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태산같이 무거웠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우울했다. 그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 힘듦을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도, 혹은 내게 먼저 다가와 나를 토닥여 준 친구도 없었다. 당시 다들 자기가 속한 회사에 적응해 나가고, 각자의 커리어를 쌓느라 바쁘면서도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굳이 내가 힘들다는 걸 드러내는 게 꺼려졌다. 얘기해 봤자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 싶었다. 그렇게 혼자서 마음 끙끙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참 외로웠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딱 한 사람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많이도 필요 없고 내 옆에 한 명만 가까이 있었어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다.
어느 날 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내 베프였다. 공부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고 엉엉 울었다. 평소에는 바빠서 연락을 잘 못하지만 자기가 힘들 때는 나를 꼭 찾았다. 마침 치열하게 육아의 삶을 살던 내게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엄마, 나는 자라고 있어요>> 모든 아이들에게는 원더윅스가 있다. 아이가 평소보다 더 보채고 울고 잠도 잘 못 자서 엄마와 아기가 함께 힘든 폭풍의 시기이다. 그런데 그 시기를 넘기고 나면 아기는 한 단계 성장해 있다. 이 얘기를 친구에게 해주었다.
"네가 지금 한 단계 성장 앞에 있나 봐. 한 단계 계단 바로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힘들다잖아. 지금 네가 엄청 힘든 건 한 계단 올라가려고 그런 거라고 생각해 봐. 조금만 더 힘내.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잘할 수 있을 거야."
친구는 알았다고 전화를 끊고 한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알아서 성장하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던 거다.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힘들 때 울면서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겠다 싶었다.
내게는 지금 가족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다. 늘 내편이 되어주는 남편이 있어서 든든하다. 하지만 가족 외에도 내 편이 있어야 한다. 남편에게 말 못 할 일도 생기기 마련이다. 남편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지금도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꼭 동갑내기만이 친구는 아니다. 학창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도 있지만 사회에서 만난 나보다 어린 사람도 있고 훨씬 나이 많은 사람도 있다. 모두에게 배울 점이 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다.
친구가 많아서 마냥 즐거울 때도 있었고, 힘든 순간 막상 기댈 친구가 없어서 몹시 외롭기도 했다. 이 모든 걸 겪어보니, 그냥 내 옆에 딱 한 사람 내 편이 되어줄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내가 정말 힘들 때도 스스럼없이 다가와줄 수 있는 사람, 나 역시도 내 고민거리와 힘듦을 편하게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내 편 한 명만 있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