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은 '주는 팔자'입니다.
찬이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 얼굴 모양에 초가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찬이야 뭐 해? 이거 무슨 그림이야?
"응, 도윤이 형 생일 선물 주려고. 16일이 형 생일 이잖아."
"뭐? 16일 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지난달부터 9월 16일이 사촌 형 생일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일찌감치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자주 봤지만, 지금은 1년에 몇 번밖에 못 만난다. 그래도 찬이는 사촌 형아를 여전히 좋아하고 종종 형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등 1학년 짜리가 스스로 며칠 전부터 선물을 준비할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틀 전에는 형에게 전화해서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었다. 종이접기를 해주겠다면서 말이다. 이것도 선물에 포함되나 보다. 사실 그런 찬이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왜 그런 것까지 닮는 거니. 뭘 그렇게까지 챙겨주는 거야. 형은 그만큼 널 챙겨주지는 않는 것 같은데?'
속으로 생각했다.
아들이 너무 남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더 많이 받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이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그림 그리고 있는 아들을 보며 기특하기도 했지만 씁쓸했다. 엄마로서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여러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나는 어렸을 때 받을 때도 많았고 주는 경험도 많았다. 그 사이에서 즐거웠다. 하지만 살다 보면 꼭 한 번 주고 한 번 받고 하지는 않았다. 더 줄 수도 있고 덜 받을 수도 있다. 주는 만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상황도 달라지고, 사람의 성향도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떠도는 말로는 '주는 팔자, 받는 팔자'가 따로 있단다.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나는 주는 팔자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받기만 하고 마음 불편한 것보다는 주는 게 더 마음 편하다. 또한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게 좋다. 상대방이 내 선물을 받고 기뻐하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주는 즐거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면 기쁘고 행복했다.
하지만 주고받으면서도 탈이 나는 게 인간관계였다. 주고받는 게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한쪽이 실망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선물을 주며 마음 쓴 만큼 상대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으면 상처를 받기도 했다.
이미 오랜 세월 다양한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혹은 마음의 선물을 주었다. 그러면서 오직 즐겁기만 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첫 번째는 내가 상대에게 뭔가를 줄 때 받을 걸 바라지 않는 거다. 진정한 선물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거라 했다. 어릴 때는 내심 나도 줬으니 받는 것도 있겠지 생각했었다. 지금은 훈련되어 있다. 기대하지 않는다. 주는 즐거움으로 내 마음 가득 채워 버린다. 주는 즐거움도 아는 사람만 안다. 받으며 기뻐할 상대방 생각하며 준비하고 건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이다. 진심을 담아 해 본 사람만 아는 특권이다.
두 번째는 선물 줄 때, 마음 쓰는 선을 정하는 거다.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음에도 돈도 마음도 과하게 써버리면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고 주는 나도 쓸데없는 낭비다. 특히 마음씀의 낭비가 정말 아깝다. 대신 가족이나 가까운 이에게는 최선을 다한다. 마음 쓰는 만큼 돌려받는 행복은 몇 배로 크니까 말이다.
나 자신은 주는 즐거움을 알고 혼자 충분히 즐기면서, 아들에게는 다른 기준을 들이미는 건 무슨 심보일까.
이미 어린 나이에 주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기특한 아이다. 찬이도 자신만의 주는 방법을 점차 만들어 나갈 거다.
"찬이야. 너의 크고 따뜻한 마음을 많은 이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렴. 그리고 더 귀하고 소중한 걸 채워가렴. 사랑과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