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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작가 Jul 21. 2024

소리소문 없는 시간

리나 편


제주 4일 차. 토요일 아침이다.

늦잠 자도 되는데, 우린 7시쯤 일찌감치 일어났다.


오늘은 아침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달리자고 미리 계획을 짜놨던 터였다. 비 소식이 있었지만, 다행히 날씨는 우리 편이었다.

차를 끌고 가장 가까운 바닷가로 향했다. 원래는 드라마 우영우에서 돌고래가 나온다고 유명해진 대정 해변으로 가려고 했으나 숙소에서 가기엔 거리가 멀었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달려야 했으므로 네비에서 가까운 해변을 찾아가기로 했다.


평소 나는 주말마다 집 앞 공원을 달리곤 했다. 3km나 5km 뛰고 나면 그 뿌듯함이 좋았다. 아침 5~6시쯤 달릴 때는, 남아공에 있는 레이첼에게는 밤 10~11시다. 나는 굿모닝, 레이첼은 굿나잇하는 시간.

아침에 달릴 때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수많은 생각 중에 레이첼이 없을 리가 없다. '한국에 있었다면 같이 달렸을 텐데.' 함께 할 수 없음에 늘 아쉬웠다.


드디어, 같은 시간에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날이 왔다. 꿈꾸면 다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 오전에는 늘 해가 구름에 가렸다. 너무 덥지 않게, 바닷바람맞으며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니 덜 힘들었고, 오히려 가슴이 확 틔이는 느낌이었다. 머릿속도 맑아지고 달리는 내내 숨은 차지만 에너지가 더 생기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매일 바다 바라보며 달릴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바라던 걸 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집중하기로 했다.

레이첼과 나는 달리면서도 중간중간 서로 달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혹은 영상으로 찍어주느라 바빴다. 역시 남는 건 사진이니까.


숙소로 돌아가 간단히 요거트로 아침을 먹은 후, 짐을 쌌다. 3박 4일을 함께한 첫 번째 숙소와는 안녕이다. 서귀포시에서 두 번째 숙소가 있는 제주시로 옮겨야 했다. 널찍하고 쾌적해서 둘이 편하게 각자의 방에서 보낼 수 있었던 첫 번째 숙소를 떠나려니 아쉬웠다. 우리의 정해진 여행이 절반을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소리소문

제주 서쪽 한경면에 위치한 독립서점 '소리소문'에 들렀다.

좁은 골목기로 들어가면 잔디밭 위에 기와집을 얹은 아담한 책방이 나온다.

아담하지만 공간 이곳저곳을 아기자기하고 알차게 잘 꾸며놨다.

벽면에는 책 그림으로 그림이 그렸져 있었고 창문에는 예쁜 천으로 가랜드를 만들어 꾸며놨다. 추억의 아날로그 TV를 갖다 놓고 화면 안에는 책으로 채웠다. 책방 곳곳에서 주인의 센스와 섬세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있는 책을 읽어보는 것도 재밌었지만, 소리소문 책방만의 이벤트가 눈길을 끌었다.

블라인드 북, 워터프루프 책, 릴레이 필사, 리커버 에디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등 참신한 콘셉트가 가득했다.

제주에 가기 몇 달 전부터 인스타에서 이곳을 공유하며, 꼭 가자고 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꽤 오래 머물렀다.



애월 카페거리

다음 목적지는, 애월 카페거리다.

인기장소이기도 했지만 토요일이라서 사람이 꽤 많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애월 카페거리에 위치한 바다를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닷물이 이렇게 푸를 수 있을까. 내 두 눈으로 보는 그 모습이 사진에 그대로 안 담겨 아쉬웠지만 푸른 바다를 배경 삼아 우리 둘을 한 장에 담았다.


선물을 사야 해서 기념품샵에 들렀다. 선물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건 탄생석이 달린 팔찌.

"우리 이거 같이 사서 하고 다닐까?"

5월이 생일인 나는 에메랄드, 2월인 레이첼은 자수정 팔찌를 샀다. 끈 조절이 힘들어서 서로의 손목에 끼워주어야 했다. 팔찌를 빼면 혼자서 다시 채우기 힘들어서 그냥 팔찌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끼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시원한 커피로 더위를 달랬다. 카페의 생명은 분위기인데, 손님 대부분이 중국인이라 원하던 감성은 안 나와서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다.



협재 해수욕장

두 번째 숙소 체크인을 하기 전 협재 해수욕장에 잠시 들렀다.

재작년 아이들과 제주 3 주살이 하면서 닳도록 다녔던 협재 해수욕장을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 내가 모래사장 위에 레이첼 이름을 적고 하트를 그려 카톡으로 보내줬었는데, 2년 후 우리 둘이 바로 그 해변에서 서로의 이름을 모래 위에 적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둘이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을 셀프 영상으로 찍었다. 옆에서 누가 보든 말든 우리 둘이 즐거우면 됐지,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마음도 없었고 오로지 우리 두 사람에 집중했다. 나중에 릴스로 만들 영상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두 번째 숙소는 감성 가득 영화에 나올법한 멋진 곳이었다. 사진과 설명은 마지막 날로 미루겠다.



한라 수목원 야시장

부담 없는 토요일 저녁은 어디에서 보낼지 많은 검색 끝에, 한라 수목원 야시장에 가기로 했다. 푸드트럭에서 저녁을 대신했고, 플리마켓을 돌며 구경했다. 레이첼이 원피스를 산다기에 함께 골라줬는데, 나까지 충동적으로 원피스를 하나 샀다. 이번 여행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을 늘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까.

플리마켓을 구경하다, 우연히 발견한 물고기 반지가 이뻤다.

"우리 이거 살까?" 물고기 반지와 실반지를 각각 하나씩 사서 꼈다. 낮에 샀던 팔찌까지, 우정반지와 팔찌 세트가 되어버렸다.

여행이 끝나고 서로 떨어져 있을 때 반지와 팔찌를 보며 서로를 떠올리겠지.

여중생이나 여고생도 아닌 40 넘은 아줌마들도 이렇게 우정의 아이템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줌마들의 감성은 조금 더 메마를 줄 알았는데, 마흔 넘어서의 이런 모습도 소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어지고, 글도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여행이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다.

나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에메랄드 팔찌를 손목에 차고 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때 내가 보고 느꼈던 기억과 감정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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