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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작가 Aug 04. 2024

커피향과 빛 그리고 마지막 밤바다

리나 편

제주 여섯째 날.

월요일이자, 제주 여행이 끝나는 하루 전날이다.


며칠 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제주 동쪽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동쪽 끝까지 가는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원래 계획은 사진 찍기 좋은 핫 스팟인 '스누피 가든'을 가려고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실내가 있는 곳으로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커피 박물관 바움 Baum

제주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원두와 커피 도구 커피와 관련된 변천사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자 카페이다. 1층에서 커피를 주문할 수 있고 전시된 것을 구경할 수 있고, 2층의 넓은 공간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미리 예약을 하면 2층 중앙에서 진행하는 커피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할 수 있다.

레이첼과 나는 2층 한쪽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입에 대기도 전에 서로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남는 건 사진이니까.



우리가 앉은자리 뒤쪽에는 빽빽하게 책이 꽂힌 책장이 있어서 북카페 느낌도 났다. 책 구경도 하면서 여유롭게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제주는 북적이고 대기시간이 많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우리가 가는 곳은 대부분 사람도 적고 한산해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유명한 핫플만 찾아 뭔가 느끼지도 못하고 깃발 꽂고 목적 달성하는 게 아닌, 어디를 가든 그곳에 젖어들고 느낄 수 있는 느린 일상을 원했다. 내가 원한대로, 아니 생각보다 더 좋았다. 



빛의 벙커

커피 박물관 바로 옆에 빛의 벙커가 있다는 걸 도착해서야 알았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바로 다음 장소로 떠나기는 아쉬워서 빛의 벙커를 관람하기로 했다.

<샤갈, 파리에서 뉴욕까지>와 <이왈종, 중도의 섬 제주> 두 가지 주제로 전시 중이었다.


1년 반 전, 레이첼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내게 서울에서 열리는 "빛의 시어터" 관람권을 주고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둘이 같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내게 가족과 보라며 티켓을 줬다. 우리 네 식구는 덕분에 빛의 시어터에 가서 멋진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레이첼과 함께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며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남아공에 있는 레이첼에게 보내줬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1년 반 만에 우리가 함께 이런 전시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함께 하고 싶었던 걸 하나씩 이뤄나가는 게 그저 기적 같고 감사할 뿐이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화가 샤갈과 이왈종의 작품이 벙커의 벽면과 바닥 전체에서 빛으로 펼쳐진다. 웅장한 음악과 작품을 함께 즐기면서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작품을 보며 화가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감탄했다.



작품 중에서 한복 입은 여자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북 치는 뒷모습이 나오는데, 그걸 보고 레이첼이 웃으며 따라 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지금도 글을 쓰며 그 영상을 다시 찾아보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과거로 흘려보내기만 하지 않고 지금 다시 보고 추억할 수 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 아니다. 우리의 경험과 추억은 계속 하나씩 쌓아나가며 공유할 내용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레이첼과 나 두 사람 관계 사이의 스토리가 풍성해지고 있는 중이다.



하도 핑크

레이첼의 탁월한 검색 실력 덕분에 근처에 위치한 맛집을 찾아갔다.

좁은 길 안쪽에 위치한 아담한 곳이었다. 식당 이름에 걸맞게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우리는 역시 또 운 좋게 대기 없이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딱새우 리조또, 부채살 마늘 소스 오일 파스타를 주문했다. 음식 맛도 좋았고, 조용한 곳이라서 차분하고 여유롭게 식사했다. 

식사가 끝난 후, 식당 건물 앞에 있는 두 사람 사이즈의 아담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여기서 영상 찍을까?"

한산한 곳이라서 길 중앙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핸드폰으로 영상 버튼을 눌렀다. 벤치에 앉아 둘이 얘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길가에 들어섰다. 

"어!!!" 깜짝 놀라 핸드폰을 가지러 달려 나갔다. 놀라는 우리 모습이 고대로 영상에 담겼다. 이런 돌발 영상이 더 재밌고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 

음식만 먹고 떠났으면 크게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앞에서 찍은 영상과 사진 덕분에 더 하도 핑크가 기억에 남는다. 각 장소마다 추억할 포인트가 있다. 어쩜 우리는 그런 세세한 포인트를 장소마다 다 만들고 다녔을까.



소심한 책방

네비에 '소심한 책방'을 찍고, 안내대로 골목길을 이리저리 따라 운전했다. 가다가 보니 새하얀 예쁜 건물이 나왔다.

"와! 여기 이쁘다." 

주차하고 얼른 내려서 건물로 들어가려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건물 밖에서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 뭐지? 어?..."

"여기 아닌가 봐."

그곳은 소심한 책방이 아니었다. 카페였다.

나는 도대체 네비를 보고 운전을 한 것인가. 분명 네비를 보긴 했는데, 예쁜 건물을 보자마자 이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책방이라고 단정 짓고 주차를 해버린 거다. 네비는 아직 목적지에 왔다고 하지 않았는데...

"하하하하"

그저 웃기다고 깔깔 웃었다. 제주에서는 이런 실수마저도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제대로 도착한 "소심한 책방".

책방 마당에 들어서기 전 조그만 핑크색 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건물의 간판은 '수상한 소금밭'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방문했던 서쪽의 "소리소문"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한쪽 책장에는 'STAFF PICK'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장이 각 책마다 책을 소개하는 글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우연히 손에 든 탁현민 산문집 <<사소한 추억의 힘>>에서 저자가 힘들 때 제주에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신영복 교수님이 저자에게 건넸다는 위로의 말을 읽는데, 마치 내게 해주는 말 같았다.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해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큰 슬픔에 절망해서도 안 되고요."  [사소한 추억의 힘에서 발췌]


이 부분을 읽는 순간 갑자기 울컥했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해 준다는 말은 앞으로 내가 어떤 힘든 일을 겪어도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주었다. 과거의 힘들었던 시간이 떠올랐고 그것을 다 견딜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순간 작은 기쁨도 아닌 큰 기쁨을 누리고 있어서 벅찼다.

서점에 서서 잠깐 책의 한 부분을 읽는데 이렇게 감정이 이입되고 흔들리는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이제 나는 온전히 글에서 감동받고 글로 치유되는 사람이 된 것인가.


소심한 책방에는 "숨겨둔 책"이라는 이름으로 된 블라인드 책이 있다. 그리고 2층에 "숨겨둔 방"이 있어서 예약을 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아치형 창문을 사이에 두고 레이첼과 나는 서로를 찍어줬다.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레이첼의 사진이 있다. '안녕' 손 흔들며 마치 작별 인사 하는 것 같았다. 우리 여행이 곧 끝나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사진이다.



동쪽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서쪽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렸는데, 얼마나 졸렸는지 모른다. 옆을 보니 레이첼도 고개를 꾸벅꾸벅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내려도 보고, 뒷목도 주물러보고 머리도 만져보고 허벅지도 눌러보며 졸음과의 사투를 했다.

남편이 생각났다. 나들이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나와 아이들은 곯아떨어지고, 남편은 혼자 졸음을 참으려 허벅지를 꼬집었다고 내게 매번 말했었다.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항상 졸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 남편도 이렇게 힘들었겠구나.'



카페 앙뚜아네트

졸음과의 사투를 끝내고 제주 북쪽 오션뷰 카페에 들렀다. 늦은 오후시간이라 커피 대신 차와 빵을 주문했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발을 벗고 발을 쭉 뻗으며 쉼의 시간을 가졌다.

카페를 나가서 바닷 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서도 우리는 인증샷을 남겼다.




신의 한모 

지인에게 추천을 받기도 했고, 이효리가 추천해서 유명해졌다는 두부 전문 식당이다.

평일 저녁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폴딩도어로 활짝 열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광경이 멋있어서 사진을 찍는데,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속도가 꽤 빨랐다. 내가 느끼는 제주에서의 흘러가는 시간의 체감 속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보는 마지막 일몰이었다. 우리 여행이 끝나감을 알려주는 듯했다.



2인세트 메뉴를 주문했는데, 두부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이 나왔다. 다른 곳에서는 먹어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였고 맛도 있었다. 아쉬운 마음과 함께 정갈한 음식을 먹으며 차분하게 제주에서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기 전에 소화도 시킬 겸 좀 걷기로 했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했다. 한쪽에 주차를 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오징어 배도 보고, 새까매진 바닷물도 보면서 마지막 밤을 아쉬워했다.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냐며 둘이 팔짱 끼고 한참을 걸었다. 



글을 쓰며 내 기억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에 닿으니, 그때의 아쉬웠던 마음이 다시 느껴진다. 

아쉽고, 그립다. 

그리고 그리워할 수 있는 추억이 있어서 감사하다.


커피의 은은한 향과 색색의 빛, 그리고 일몰과 밤바다까지, 모든 감각이 감동했던 여섯째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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