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내 선택이니까.
무엇을 하든 우리는 선택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뭘 간단하게 먹을까부터, 친구를 어디서 만날까,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다양한 선택의 연속선상에 있다. 자다 꾸는 꿈도 우리가 선택해서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속에서만이라도 멀리 떠난 그리운 사람들을 실컷 만나고 평소에 내 능력이 부족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즐기는 호사를 누려볼 수 있다면.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왜 캐나다로 이민을 갔느냐'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젊은 시절 새로운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서였다고 대답한다. 사실은 남편이 결혼 전 미국으로 일 년연수를 갔다 온 후 북미에서 살고 싶어 했다. 결혼 후에 우리는 절박한 이유 없이 그냥 한 번 해보자라는 호기심으로 이민을 신청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날짜를 미루고 또 미루고 더 미루면 이민이 취소될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는 이민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10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도 다소 흥분되어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묘한 긴장감과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처음 보았던 밴쿠버의 맑디맑은 하늘 그리고 거리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나뭇잎들 나는 그때의 싱그러움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맑고 아름다운 기억은 그날 딱 하루였다. 그다음 날 그리고 또 그다음 날도 비는 계속 왔다. 한꺼번에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산 없이 걷기에는 뭐하고 참 애매한 비가 끊임없이 왔다.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엄마도, 언니도, 친구도...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나는 왜 이민을 선택했는지? 이민 오기 전에 익히 들었던 대로 그때 밴쿠버의 많은 한인들은 자영업자들이 많았고 전문 직업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인 마켓을 가면 야채나 공산품을 빼고는 많은 것들이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떡이며 빵이 오랜 보관으로 수분이 없어져서 얼음이 생겨있어도 난 그것들을 사서 데워먹으며 행복해했다. 길을 가다가 한국말이 들리면 멈춰서서 '한국분이세요'라며 인사를 나눌 만큼 주변에 한인 수도 적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큰 한인 슈퍼가 두 개나 있고 이곳 현지인들이 싱싱한 야채나 과일 그리고 다양한 상품을 사러 일부러 한인 슈퍼로 올 정도이다. 특히 내가 살고 있는 한인타운 코퀴틀람(Coquitlam)에서는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인 상권이 발달되어 있고 코퀴틀람 시에만 한인 인구가 거의 만 명에 가깝다.
무엇을 해서 먹고사나? 나는 영어가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둘째를 낳자마자 직장을 찾으려고 했다. 운이 좋게도 이력서를 넣는 곳마다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렇게 한 두 군데에서 일을 해보니 '내가 십 년 후에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남편은 내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차라리 공부나 하지 그래?'라고 했다. 본인은 어차피 영어가 부족하니 본인이 아이들을 키우는데 집중하고 내가 공부를 해서 전문직을 잡는 게 더 빨리 가는 길이라고 조언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하니 공부해서 뭐하냐고 했다.
어차피 경쟁에서 백인들에게 밀릴 것이고
결국 이민자 1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차라리 돈이나 빨리 벌지.
영어를 배우러 무슨 대학까지 가서 배우냐고 하기도 하고
남편이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민까지 와서 공부하게 해 주냐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돈을 벌어가며 대학원을 다녀야 했고 우리 네 식구 생계를 책임지는(영어로 breadwinner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가장이 되어버렸다. 이민 생활에서는 언어 문제로부터 더 자유로운 사람이 돈을 버는 주체가 되기 마련이다. 나는 주말이면 중고등학생들에게 영어 에세이 쓰는 법을 가르치고 주중에는 학교 조교 말고도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 늘 잠이 부족했고 학교와 집이 멀어서 전철이나(밴쿠버에서는 스카이 트레인이라고 한다) 버스 위에서 책을 읽다 졸기도 참 많이 졸았다. 그러나 이십 대 후반 아이 둘이 있는 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아이들을 키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우리 가족 네 사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공부하고 돈 버는 엄마로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아빠로 이민생활을 어어갔다.
"아니"라고 말해야 맞는 답이다.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도 능력도 부족했다. 나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공부나 해야겠다'라고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한 분야에 저명한 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체력이 단단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때그때 열심히 살았다. 부딪치고 깨지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더 나아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 후회스럽다고 뒤돌아보고 서있기보다는 난 그저 앞으로 걷는 일에 더 몰두했다. 남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으나 내 아이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생각하고 양보할 줄 알며 인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진짜 우리 인류의 환경을 걱정한다 ㅎ)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쓰레기 양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지나간 내 선택들에 후회가 없다. 우리는 함께 성장하고 그 성장은 지금도 진행중이니까!
"응"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캐나다로 이민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캐나다의 뛰어난 자연환경, 의료 시스템, 교육 환경, 노후 복지 등은 분명 매력적인 부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들이 반대로 역이민을 결정하게 되는 요인들이기도 하다. 사람이 좋은 공기만 먹고살 수 있나 영어가 부족한 이민자들에겐 직장 잡기가 어렵고 의료 서비스가 무료인 것은 맞으나 한국과 비교해서 상당히 느리다. 한국에 비해 경쟁이 심하지 않고 공교육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캐나다에 늦게 이민 온 많은 한국 학생들은 영어 글쓰기로 어려움을 겪는다. 노인 연금 복지가 65세가 넘으면 개인연금과 상관없이 누구든 최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그래서 노후 대비에 대한 걱정이 적은 반면 이곳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 노인들은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단점은 저마다 개인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른 경험들을 만들어 낸다.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우리가 선택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나에게 캐나다 이민은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열거한 캐나다 제도나 환경의 장점들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이민 생활이
여러 인종들과 더불어 살다 보니 남이 나와 다른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나와 다른 남을 더 존중하게 되며
영어 때문에 당당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보니 나보다 못한 약자에 대한 배려가 늘고
문화적 충돌로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기면 오해를 풀기 위해 더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려고 노력하게 되며
경쟁에 덜 노출된 두 아이들의 순한 마음이 때론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고 남을 배려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아이들을 통해서 나도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며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자주 성찰하게 된다. 한국의 좋은 점과 캐나다의 좋은 점만을 내 안에 키우고 싶다.
내가 한국에서만 살았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있을까. 나에게 20대 후반으로 다시 돌아가 같은 선택을 하겠냐고 물으면 솔직히 과거로 돌아가 살아왔던 길을 다시 열심히 살 용기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오게 만든 이민에 대한 후회는 없다. 이민 생활은 분명 쉬운 길은 아니지만 나에겐 좋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