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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맘 Jun 08. 2024

기간제란 타이틀이 싫었습니다.

영어를 전공했는데 과학 수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5학년 1학기 과학수업을 분주하게 준비 중이다. 과학수업이 들은 요일은 마음이 묵직하다. 나의 주종목이 아니라서 준비에 준비를 해도 여전하다. 4단원은 용해와 용액이고 오늘 5차시 수업은 용질에 따라 녹는 양이 달라지는지 비교하는 실험이다.

용매는 녹이는 물질로서 물이다. 용질은 녹는 물질로 설탕이나 소금을 말한다. 용해는 녹는 과정이고 용액은 완전히 녹은 액체이다. 나도 처음에는 헷갈려서 내가 먼저 어떻게 기억하고 학생들에게 수업할까 고심하다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단순하게 물이니까 미음의 용매, 설탕이나 소금은 녹는 물질이니까 지읒의 용질, 녹는 과정은 해결되는 과정이라 히읗의 용해, 그리고 완전히 녹은 용액은 많이 들어본 말이니까 용액! 끝!

영어를 전공했으니 10년 전에는 중고등학교에서 당연히 영어를 가르치는 기간제로 일을 했다. 초등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햇수로는 4년이 넘었다. 영어는 이제 쓸모없어지고 있다. 힘들게 공부한 영어는 한마디도 못 하고 기역, 니은을 가르치고 있다니 어떨 때는 수업하다 헛웃음이 나올 때도 있다.


이러려고 영어 공부했냐?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번 해에는 2학년 즐거운 생활의 놀이(거의 체육전담)와 5학년 과학수업을 하고 있다. 싫어도 못해도 해야 한다고 계약서 쓰고 서명했다. 운동장에서 축구 인사이드 드리블 가르치는 수업이 끝나면 2층 과학실로 달려가 6개 조의 소금과 설탕, 물을 각각 패트리 접시와 비커에 준비한다. 출근하자마자 해놔야 했는데 아침에는 ppt를 열심히 꾸미느라 미쳐 과학실에 얼굴도 들이밀지 못했다. 학생들이 오기 전 10분 동안 혼이 쏙 빠지게 실험준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와중에 화장실도 가고 싶지만, 목이 말라 갈라질 것 같지만 차가운 커피도 못 마신다. 이뇨작용에 내 몸에 있는 소중한 수분과 땀마저 수업시간에 마려울지 모르니 일단 참아 본다.

    

과학 수업 준비에서 제일 공을 들이는 것은 수업내용 준비보다 <오늘의 퀴즈>다. 이 방법은 처음 과학수업을 시작한 2021년도부터 해오던 거다. 일급비밀이다. 그만큼 효과가 대단하고 학생들은 과학수업보다 퀴즈 타임을 더 기다린다. 넌센스 퀴즈 같은 것들은 절대 출제하지 않는다. 기본 상식 퀴즈라서 도움이 될 테면 될 것이고 맞춘다면 그것 자체로 기쁨의 보상이 있다. 오늘 준비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

2. 우리나라는 몇 개의 광역시로 이루어져 있나요?

3.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위 세 문제를 냈다. 두 번째 문제는 맞혔지만, 나머지는 학생들이 입도 뻥끗 못 했다. 문제는 넌센스가 아닌데 그래도 어떻게든 넌센스 같은 웃음을 유발하는 대답을 해내서 맞추려고 노력들이 대단하다. 과학 수업을 들으러 과학실에 오는 게 아니라 퀴즈 풀러 오는 학생들도 개중엔 몇 있다. 어찌어찌 과학수업을 무사히 끝내고 나니 메시지가 와있다. 오늘 학교에 못 나온 담임선생님을 대신해서 4학년 3반 수업에 들어가란다. 가라면 가야지 어쩌겠는가. 보결 수업이라고 그냥 책을 읽게 한다든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수업자료들이 보관된 나의 보물 usb에는 이럴 때 써먹을 만한 자료가 많이 있다. 오늘 오랜만에 영어로 입 좀 풀어봐야겠다고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파일을 또각 클릭했다. 그림연상퀴즈가 꽤 재미있고 그동안 반응이 좋았기에 이걸 써먹기로 했다.

화면에는 검정 봉지, 나무젓가락, 500밀리 물병, 그리고 개 목줄이 보인다.

미래 시제 문법 <be going to + 동사원형>을 이용하여 위의 그림을 보고 선생님이

“What am I going to do?” 내가 무엇을 할까?

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You are going to 다음에 동사원형>을 쓰는 구조를 배우는 퀴즈이다.

그림만 봐도 정말 맞추고 싶고 개를 산책시킨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영어로 할 줄 몰라 멈칫멈칫 손을 들까 말까 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러던 중 어떤 용기 있는 학생이

“You are going to 산책 with dog.”

“Yes! Good try!”

정확한 정답은 아니지만 시도한 것에 대해 큰 칭찬을 해주었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지나가다가 나를 몇 번 본 학생들이나 동생이 2학년인 학생, 또는 언니 오빠가 5학년에 있는 학생들이 궁금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무슨 과목이에요? 몇 반 담임이세요? 원래 체육 선생님 아니에요?

”아냐, 저 선생님 우리 형 과학 가르쳐. 근데 영어 왜 이렇게 잘하세요?“

초등학교 4학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입꼬리가 쓰윽 올라간다. 그래서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신나서.

”선생님은 영어가 원래 전공이고 과학은 부전공이야. 그런데 2학년 체육을 이번 연도에 맡게 되어서 더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서 요가학원도 다니고 있어. 2학년 교과서 보니까 요가 동작이 꽤 많이 나오더라고. 그런데 그거 아니 얘들아? 내 진짜 직업은 따로 있어. “

”뭔데요?“

”작가.“

학생들이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대답에 눈이 더욱더 커졌다.

더 새삼스럽게 놀란 건 나 자신이었다. usb 자료들을 보니 참 열심히도 준비했었다. 영어 동화, 영어 요리 레시피, 팝송은 당연하고, 문법 설명도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예시를 찾느라 영화도 참 많이 찾아다녔던 흔적들…. 4년 전 처음 초등학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당연히 영어 수업을 줄 줄 알았는데 과학수업을 주셔서 크게 당황했고 과연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었지만, <코스모스>라는 책부터 사들여서 읽어봤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5학년 아무 페이지나 펼쳐봤는데 우주 단원이 나왔던 것이었다.

지금 가르치는 2학년 놀이단원에는 요가 동작들이 중간중간 많이 나온다. 작년부터 요가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나의 선견지명이 참 대단하다. 요가학원에 가면 요가를 못 하는 학생이지만 학생들 앞에선 요가 선생님이었다. 학생들 앞에서 마음껏 내 실력을 뽐내고 진짜 요가학원 선생님인 것처럼 학생들 자세를 봐주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학생들이 우와! 하면서 물개박수를 쳐준다.

이러려고 내가 요가 했구나!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결혼하고 나서도 임신하기 전까지 중등임용고시 준비를 했다. 정말 열심히 했으나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독서실이 9시에 열었는데 더 일찍 하려고 독서실 사장님한테 부탁드려 7시에 문 따고 들어가 공부했다. 깨끗이 시험을 포기할 때는 서운하지 않고 미련도 없었는데 학교에서 기간제 생활을 할 때는 가끔 한 번 더 도전할걸, 지금이라도 한 번 더 공부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기간제라는 단어가 싫었다. 왜 하필 이름이 기간제지? 라는 불만 섞인 반감이 생길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학생들한테 내가 기간제라는 신분을 들키기 싫었다. 초등학생들은 기간제라는 용어 자체를 모르는 학생이 많기도 하지만, 중고등학생들은 내가 기간제인 걸 안 순간부터 대놓고 무시를 하고 깔본다.

"선생님, 이 문제 맞혀보세요. 맞추면 제가 인정해 드릴게요."

이 말을 수업시간에 듣고 복도로 나가 눈물을 훔쳤다. 문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인생이 참 고달프고 어려워서였다. 인정받으려고 중3이 내민 고3 문제를 풀어야 했다.

기간제는 학교 측과의 계약을 통해 정해진 기간 일하는 교사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어감은 꼭 내가 이 기간이 끝나면 시한부 환자처럼 진짜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 나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죽지는 않지만, 기간제인 나는 다음 기간을 더 살기 위해 12월부터 슬슬 구직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직업이 곧 내 인생 전체라 생각하고 사회가 정한 기간제의 의미를 나만의 해석으로 나를 가두었다. 정교사 자격증을 가진 선생님들은 바를 정인 선생님이고 나는 사회가 인정해주는 바른길이 아닌 구불구불한 길로 학교에 겨우 들어가 기간 내에는 학교와 맺은 계약대로 업무도 열심히 하고 가르치는 것도 바르게 해야 하는 그런 존재인 거 같아 기간제란 이름 아래 서글퍼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욱더 영어면 영어, 과학이면 과학,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할 때도 주어진 기간에는 평가 절하 받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까지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있다.

지금은 학교 선생님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고 있고 1인이 투잡도 하고, 평생직장이 없는 시대다. 다행이다는 생각이 든다. 기간제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내 마음을 살살 달래주려고 한다. 발목이 잡혀 있는 정교사가 아니라 언제라도 여기 길도 가보고 저기길도 한번 기웃거릴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인생길을 지금부터 더 재미있게 여행할 것이다. 오늘 4학년 3반 수업이 이런 번개 같은 순간의 강렬한 깨달음을 줄 거라는 걸 모르고, 수업 들어가기 10분 전에는 푸념하고 있었다.     


며칠 천 도서관에서 빌린 니체가 마흔 넘어선 나에게 다시 한번 강하게 얘기해 주고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생각 자체를 바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운명을 사랑해라.“

“신은 죽었다. 참된 세계였던 저 세계와 결별하고 이제 남은 것이 이 세계이다. 익숙함과 결별하고 내가 원하는 나로 살아라.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기간제 내 인생! 주어진 그 시간 동안 더 열심히 살게 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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