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임종
"빨리 와, 빨리 와, 어떡하면 좋아"
8월 29일 금요일이었다.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그런 걸까, 여즉 선명하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 앞에 신호 하나를 남겨두고 오전 10시경 엄마와 통화를 했다.
저번주에 검사를 하고, 월요일에 결과를 받았는데 이번엔 아빠가 의사에게 직접 말을 했다고.
그 말을 듣고, 아빠가 그냥 놔버렸다고 했다.
의사는 3개월 정도 남았으니 이제 주변 정리를 하시라고 했단다.
그런데 아빠는 그 얘기를 듣고는 바로 시들어버렸다.
의사는 3개월이라고 했지만, 엄마는 길어야 한 달 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엄마의 느낌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더라.
아, 엄마의 감이구나.
그래서 정말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왠지 오늘 무조건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평소에는 잘 챙기지도 않던 끼니를 그날은 먹어야만 할 것 같았고, 동생들에게 회사에 상조 관련 복지가 있는지 확인하게 시켰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상조 관련해서 확인해 보라고 하니, 여동생은 놀라서 전화가 왔고.
여동생과 통화를 하고 끊은 직후 바로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오전 11시가 되지도 않았고, 엄마와 통화를 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못했었다.
엄마는 그저 울며불며 빨리 오라고 했다, 빨리 오라고.
운전을 못할 것 같아 택시를 불렀고, 택시를 타고도 꼬박 1시간이 걸렸다.
날이 좋았다.
63 빌딩이 선명하게 보였고, 남산타워의 끝자락까지 선명히 보였다.
하늘이 맑았고, 구름이 선명했고,
그저 도로만이 빨간빛으로 가득했다.
1시간이 꼬박 걸려 도착한 병원,
아빠는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짐승처럼 '아, 아' 하는 소리만 내며 손을 휘저었다.
남아있는 힘은 없고, 진통제를 다 떼고 나니 그저 고통만 남아 몸부림치는 것이었으리라.
점심 즈음, 한 차례 고비는 넘긴 것 같았고 이제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당장 아이를 어떻게 하원시킬지, 하원 후 어떻게 할 건지부터 정리해야 했다.
시댁이 가깝고, 다행히 어머님께서 봐주실 수 있는 상황이라 아이를 하원해서 바로 맡겼다.
맡기고 나서 남편과 저녁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출발했다.
그냥 오늘 봐야 할 것 같았다.
월말이고, 금요일이고. 미팅도 있고.
남편에겐 미안했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아침부터 쭉 선연하게 이어졌기에.
다시 가는 길, 여동생에게 또 한 번 전화가 왔고 길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또 빨간빛으로 가득했다.
하나 달라진 건 늦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귀를 때리고 있었다는 것.
도착 후,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심박 수는 자연스럽게 떨어졌고, 호흡도 자연스레 멈추었다.
의사는 사망선고를 했고, 다행히 우리는 모두 임종을 지켰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빠도 한스러운 걸까. 이제 겨우 63살인 우리 아빠.
그중 2년을 투병해 오던 그에게 사실상 건강하던 삶은 고작 60년 남짓이었다.
원체 성격이 급하고 불 같았고, 외골수이던 성격이 마지막까지 한결같아서 가는 길까지 그렇게 급하게 가야 했나 보다.
찰나의 순간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드라마처럼 요란하지 않았고, 아빠는 중환자실에 있지도 않았으며, 여느 드라마처럼 기계음이 들리지도 않았다.
천을 덮어주지도 않았고, 그저 호흡기를 떼고 얼굴에 휴지조각 같은 작은 것으로 눈코입만 가렸다.
엄마와 여동생은 또 한 번 무너졌고, 남동생은 겨우 눈물을 참고 있었다.
이제 고작 25살이 된 우리 집 막내, 상주, 아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상조를 확인했다.
낮에는 있던 빈소가 저녁에는 없었고, 겨우 다음날 비는 빈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망확인서를 챙기고, 빈소를 계약하고, 영안실에 안치하고.
사망 후에는 그저 바로 현실이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현실을 직시해야 했고, 이성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버거웠지만 그래야만 했다.
울지 않으려 애썼고, 특히 엄마 앞에서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엄마만 무너져 내릴 테니.
영안실 안치, 입관 전 확인 모두 내가 하였다.
장례지도사가 보았을 때에도 내가 가장 이성적으로 서 있으니 그리하였던 것 같다.
확인하고 나와서는 사무실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불과 일주일 전에 봤을 때에도 의식이 있었는데.
엄마 생일날 모였을 때에도 의식이 있었는데.
의사의 한 마디에 모든 걸 포기하고 놓아버렸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불안감에 쉽게 쌓이고, 우울감이 종종 몰려오는 성정이라 새벽에 잔잔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아들으며 댓글을 읽기도 한다.
그 속에서 위안을 받기도 하며.
글을 쓰며 우연히 찾은 플레이리스트의 댓글에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의사가 3개월 남았다고 하면 너무 기쁠 것 같다고.'
몇 번이고 글을 다시 읽었고, 슬펐다가, 화가 났다가, 미웠다가, 안쓰러웠다가, 증오했다가.
마지막엔 공허해졌다.
3개월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도, 그냥 포기해 버린 아빠가 생각났다.
조금만 더 봐주지, 손자 세 돌도 보고 가지, 아들 생일과 딸 생일도 다 보고 가지.
왜 그렇게 갑자기 다 놔버려야 했을까.
엄마에 대한 부채감에 얼마나 짓눌려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나는 더 빨리 화해하지 못했을까.
내가 아빠의 부채감에 돌을 하나 얹어놓았다는 마음에 울 자격조차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빠의 49제는 공교롭게도 막내의 생일과 같았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그것이 막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대어 보는 게 아니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영정사진을 태우고, 하늘로 곱게 날아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또 한 번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임종날은 비가 쏟아져내렸지만, 49제 날만큼은 그렇게 날이 좋을 수 없었다.
한평생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우리 엄마.
49제를 마치고 엄마를 데리고 무작정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엄마와 나, 아들. 얼렁뚱땅 첫 3대 여행이었다.
여행 도중, 정말 갑자기 아이가 외할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엄마, 외할아버지는 많이 아프시지? 그래서 하늘나라 가신 거야?"라고.
순간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엄마는 그저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붉히실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아파. 외할아버지는 한 번에 크게 아프셔서 하늘나라에 가셨대.
하나님이랑 같이 계실 거야. 00 이가 기도 많이 해줘"
그저 앞만 보며 아이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응, 00 이가 아멘 해서 외할아버지 인사할게"
어린아이들도 생과 사, 삶과 죽음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49제 날처럼 맑게 개인 제주 하늘 아래에서 갑자기 아이가 그런 말을 꺼내니,
아이들도 느낌으로 다 아는 게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저 편안히 잘 지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