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에 스민 시간과 마음

배추 한 포기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 햇볕 아래 완성된 엄마의 손길

by sunny


김장철이 다가오면,

나는 가장 먼저 친정집부터 떠올린다.

부엌 가득 차오르는 배추 향,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부모님의 한 해 농사.



배추는 아버지가 손수 기르신 것.

이른 새벽부터 밭으로 나가

벌레가 어린싹을 먹는 건 아닌지,

무름병이 생기진 않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살피셨다.

말은 없었지만, 배추 한 포기 한 포기에

자식들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고춧가루는 엄마의 손끝에서 준비됐다.

햇볕 좋은 날 마당에 펼쳐 말리고,

뒤집고, 방앗간에서 매운 냄새를 맡으며

지키고 앉아 계셨다.

그렇게 완성된 김장은 그 해 겨울,

우리 가족의 밥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힘이 된다.





시간이 흐르면 그 김치는 묵은지가 된다.

익고 또 익어 진해진 맛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열노하신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이 발효된,

시간의 흔적이다.



냉장고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묵은지를 꺼낸다.

맑은 물에 여러 번 헹궈 시큼한 맛을

덜어내고, 속살만 남긴다.

조용히 물기를 짜내는 손길은

오래된 추억을 정리하는 듯 차분하다.



들기름은 엄마가 농사지은 들깨를

방앗간에서 짜주신 것.

뚜껑을 열자 퍼지는 향에,

엄마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진다.

참치액과 올리고당은 내가 준비했지만,

그것마저도 가족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송송 썬 파를 넣고

조물조물 무친 뒤 볶기 시작한다.

지글지글, 숨이 죽으며 퍼지는

고소한 향이 부엌을 가득 채운다.



그 맛은 강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잔잔하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묵은지볶음을 한입 먹을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마음과 그 계절의

수고로움을 떠올린다.




어쩌면 이건 그냥 반찬이 아닐지도 모른다.

먹는 이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한 접시의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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