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학원 강사로서의 마지막 순간,
나는 여전히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수십 명 앞에서 강의하던 시간이 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졌지만,
어느 날 그 무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퇴직이 아니었다.
또 다른 삶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곧 엄마가 되었다.
결혼 후 원주에서 안산으로 이주해 작은 신혼집에 둥지를 틀고,
첫 아들을 품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평온한 신혼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남편은 오 남매의 장남.
결혼하지 않은 시동생과 시부모님까지 함께 지내는 대가족 살림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오랜 당뇨를 앓고 계셨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나면서 내 하루는 온전히 살림과 육아로 채워졌다.
아침부터 밤까지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도 끝이 없었다.
밥상 위에는 늘 음식이 넘쳐났지만, 내 마음에는 허기가 쌓여 갔다.
명절이면 상황은 더 벅찼다.
남편 형제들과 그 가족들이 찾아오면,
설·추석 명절상과 시부모님 생신상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침을 치우고 나면 곧 점심, 점심을 치우고 나면 금세 저녁.
하루 종일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반복하다 보면,
두 손과 어깨는 늘 쑤셨고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명절에 부모님 뵈러 가던 내 친정은 점점 멀어져 갔다.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명절마다 내려가지 않게 되면서,
어느새 그것이 굳어진 규칙이 되었고,
남편 형제들도 내가 명절에 친정에 가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듯 했다.
명절에 친정 부모님께 인사드리지 못한 세월이 어느덧 15년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내 손은 원래부터 예쁘지 않았지만,
집안일을 도맡다 보니 조금만 보습을 게을리해도 금세 갈라졌다.
동사무소에 인감을 떼러 가면 지문이 제대로 찍히지 않아 애를 먹곤 했다.
내 몸과 마음이 살림의 무게에 깊이 매여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증거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나는 점점 ‘나’라는 이름을 잃어갔다.
아내, 며느리, 엄마로만 불렸을 뿐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들을 보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내 것이 아니었다.
거울을 마주한 어느 날,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
텅 빈 눈빛.
사는 게 왜 이렇게 무의미할까.
왜 이렇게 지칠까.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끝없는 살림 속에서 잃어버린 나.
하지만 아주 작은 계기로 나는 다시 나를 찾기 시작했다.
2-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