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내, 사업가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육아와 살림만 하다가 사회에 나와 작은 사업을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힘들다거나 어렵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리폼으로 책을 출간하고, 작은 공방을 열었던 그 시절.
나는 그저 “행복하다”는 마음뿐이었다.
대학 진로를 선택할 때 가정 형편 탓에 꿈꾸던 실내 인테리어를 포기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컴퓨터학과에 진학해 강사로 7~8년을 살았고,
결혼과 함께 안산으로 이주해 전업주부로 지냈다.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살림 속에서 나는 그저 며느리였을 뿐,
‘나’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다 리폼을 만나면서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았다.
어릴 적 꿈을 다른 형태로나마 이뤄냈다는 것이 내게는 큰 위로였다.
작은 공방은 나 혼자 사장이자 노동자인 1인 사업장이었지만,
DIY 강좌로 회원을 모으며 활기를 띠었다.
8평 공방을 40평으로 확장하던 날,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부푼 꿈에 가슴이 벅찼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자 내 삶은 달라졌다.
쇼핑몰 운영도 시작했고, 고마운 인연들이 곁에 있었다.
묵묵히 외조해 준 남편,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던 블로그 이웃들,
쇼핑몰 서포터스로 힘을 보태 준 블로거님들, 자재를 공급해 주던 사장님까지.
덕분에 공방을 운영하는 동안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마음은 늘 즐거웠다.
헌 가구가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
머릿속에만 있던 디자인이 회원님 댁에 맞춤형으로 완성되는 기쁨.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책을 내고 공방 사장이 되면서 새로운 인연도 많이 생겼다.
그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만남이 좋은 인연으로 남아 몇십 년을 이어간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물론 모든 만남이 다 아름답진 않지만,
지금은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들만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
남편은 내가 집안일만 하던 시절,
공방을 하고 싶다는 말에 주저 없이 보증금을 마련해 주었다.
덩치 큰 가구 배달이 필요할 때면 함께 나서 주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내 능력을 알아본 것인지,
아니면 경제활동하는 아내를 바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이 든든한 조력자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는 남편에게 어떤 아내였을까?”
잔소리 많고 성격 급한 다혈질.
아마 남편이 감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 아내인 나의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남편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은,
남편이 누구보다 고마워할 것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인연들을 이어가던 그 무렵,
내 마음 한편은 답답하고 먹먹했다.
‘그동안 내 두 아들은 어땠을까?’
큰아들은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다.
올해 스물네 살, 부모의 말에 성실히 따르며 곧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준비한다.
문제는 내 아픈 손가락 같은 작은아들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 많고 밝은 아이였는데,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적응이 쉽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담임선생님의 면담 요청을 받았고,
매년 학년 초마다 교무실을 찾았다.
아들은 착했다.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본인이 괴로웠을 뿐,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충분히 살펴주지 못했고,
아이를 괴롭히는 친구 문제에도 제때 대처하지 못했다.
그게 지금도 마음에 큰 후회로 남아 있다.
엄마가 집을 벗어나 즐거운 생활을 하는 동안,
내 아들은 학교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자책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곁을 지켜주었다면,
아이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들어 작은아들이
조금씩 사회성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마음에는 미안함이 남아 있지만,
엄마로서 한결 놓이는 순간도 생기고 있다.
다음 편 예고
5편에서는 내가 실패라 여겼던 순간들을 돌아보고,
그 시간이 어떻게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 보물이 되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