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 한 롤에서 배운 관계의 온도

말 한마디의 방향이, 마음의 온도를 바꾼다.

by sunny

사무실 수납장 문 안쪽에 부착된 큰 화장지 롤에서

휴지를 풀어 사용하다 보니, 잘 풀리지 않고 자꾸 끊어졌다.




나는 무심코 “이 방향으로 넣으면 더 잘 풀릴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상대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순간 정색하며 “지적하는 거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에 조금 놀라면서도 곧바로 말했다.
“그런 뜻은 전혀 아니에요. 조금 불편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그리고 덧붙였다.
“혹시 제가 그렇게 들리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정말 없었어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음 한쪽이 묘하게 불편했다.
상대의 반응을 이해하려고 해도
‘내 말이 그렇게 예민하게 들릴 말투였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겐 정말 별 뜻이 없었다.
그저 조금 더 편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정보를 전하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비판’으로 받아들였고,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내 말투를 되짚어보게 됐다.


나는 집에서는 남편, 아이들, 시어머니에게
잔소리를 조금 많이 하는 편이다.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해 나가기 위해서는
공통으로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것이 있기에,
나는 그 잔소리의 악역을 도맡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말투가 사회생활 속에서도
조금씩 스며들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상대도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서로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다행히 분위기는 조금 풀린 듯했다.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엔 묘한 앙금이 남았다.
아마 상대의 마음에도 나처럼 작은 찌꺼기 하나쯤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사람 사이의 관계란 참 미묘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 동료와 나는 사적인 이야기도 자주 나누는, 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놀랐다. 별 의도 없이 한 말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어떤 말은 의도보다 강하게 들리고,

어떤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말투와 표정을 한 번 더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생활의 편리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편할까를 늘 생각하는 편이라,
그날도 단지 생활의 편리성 차원에서
휴지를 반대 방향으로 끼우면 더 잘 풀릴 거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상대에게는 ‘지적’처럼 들렸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은 일 덕분에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대하는 내 태도를 새로 배우게 된 것 같다.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건넨 말 한마디가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예전에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상대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를 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참 어려운 거 같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기억하고,
내 말투와 태도에 고칠 부분이 있는지 찬찬히 나를 들여다보려 한다.


타인의 생각과 행동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도 소중한 인격체이고, 나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르지만

타인도 소중한 인격체임을 기억해야겠다.
나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냥 두고 보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말의 온도는 결국 마음의 온도에서 비롯된다는 걸.


휴지 한 롤에서 시작된 사소한 일은

결국 내 안의 조용한 성찰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그 수납장 앞을 지나며 생각한다.




때로는 침묵이, 가장 따뜻한 말일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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