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소환 일기장
체육 선생님은 S 대 출신의 총각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흰색 트레이닝복을 주로 입었다. 혀가 짧아 발음이 살짝 웅덩거렸다.
어느 날, 약간 축축하고 음산했던 날, 교문 앞에 바바리맨이 나타났다.
그렇다, 교복 입고 지나가는 어린 여학생들 앞에서 훌러덩 바바리를 펼친다는 바로 그 바바리맨.
교실에 들어서는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며 울먹이기도 했고, 별거 아니더라며 코웃음 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바바리맨을 보지 못했다.
내가 친구들의 바바리맨 목격담을 매우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창가 쪽 친구가 소리쳤다.
"어라? 저 ㅅㄲ 아직도 안 갔네? 저기 있다! 바바리맨!"
"어디? 어디?"
아이들이 앞다투어 우르르 창문에 매달렸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나도 아이들 틈에 낑겨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교실안은 그렇게 한쪽으로 쏠려 술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드디어 아이들의 손가락 끝을 더듬어 바바리맨을 발견했을 때, 어디선가 별안간 혜성처럼 나타난 체육쌤이 교문 근처의 바바리맨을 향해 달렸다. 쓩~하고.
당황한 바바리맨은 멍청하게도 운동장 쪽으로 내달렸다. 아주 뜻밖의 계주였다.
우리의 체육쌤은 엄청 빨랐다. 막 우사인 볼트 같았다.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나던 바바리맨을 순식간에 따라잡아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제압했다.
"우와~"
아이들이 창문에 매달려 꽥꽥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쳤다.
그날, 체육쌤의 바스락거리는 재질의 흰색 트레이닝 복이 막 야광복처럼 환히 빛났다.
나는 체육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막 체육부장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체력장 5급의 소문난 몸치였다. 몸으로 하는 건 죄다 꽝이었다.
앞구르기나 뒤구르기를 하면 매트는 저짝에 가 있고 강당 맨바닥을 온몸으로 문대며 청소했다. 뜀틀은 넘어 본 적이 없고, 매번 그냥 올라탔다. 윗몸일으키기는 배치기를 안 하면 10개를 넘기기 힘들었고, 던지기 공은 팔이 빠지도록 내던져도 코앞에 툭 떨어졌다. 매달리기는 그나마 악으로 깡으로 죽기 살기로 철봉에 매달렸는데, 희한하게 팔뚝은 멀쩡하고 목에만 피멍이 들었다.
뭐 하나 문제가 아닌 것이 없었지만, 그중 가장 문제는 바로 100m 달리기였다.
"야, 인마! 장난하냐? 누가 너더러 걸어들어오래?"
"걸어들어온 거 아닌데요.."
"걸어들어온 거 아니면 기어들어 왔냐? 무조건 20초 안으로 들어와! 알겠어?"
나는 너무 억울했다. 내가 당신 앞으로 달려오기 위해 얼마나 죽기 살기로 전력 질주를 했는데... 막 눈물이 솟아 나왔다.
그날도 그는 무조건 20초 안으로 끊으라며 나를 계속 뺑이돌렸다. 하지만 정말 젖먹던 힘까지 내달려도 기록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나는 막 울먹이며 한 손을 높이 쳐들었다.
"뭐? 질문 있어?"
"네. 어떻게 해야 빨리 뛰는 건데요? 쌤, 방법을 알려주세요."
"빨리 뛰면 빨리 뛰는 거지 방법은 무슨 방법? 그러니까 너는 걷지 말고 뛰라고!"
"선생님, 막 팔을 빨리빨리 하면 될까요?"
"그렇지! 팔을 빨리빨리 하면 발도 빨리빨리 움직이겠지? 그것도 방법이야. 암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빨리 뛰라고! 알겠지?"
"네!"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저 100m 앞에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나의 쌤에게 더 빨리 가기 위해, 나는 막 팔을 빨리빨리 휘저었다. 팔에서 막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빨리빨리빨리 정말 죽어라 흔들었다.
내가 막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쌤의 곁으로 갔을 때, 체육쌤은 입에 물고 있던 호루라기를 뱉어내며 환하게 웃었다.
아주 환하게~ 세상이 다 밝아질 정도로.
아~ 내가 드디어 해냈구나!
나도 쌤을 마주 보고 헤벌쭉 웃었다. 맹하게 웃고 있는 내 이마를 쌤이 꽁하고 쥐어박았다.
"야, 인마! 넌 뭔 놈의 제자리 뛰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냐? 내가 진짜 웃음밖에 안 나온다. 풉-"
쌤이 들고 있는 초시계에는 22초가 찍혀있었다.
*
백신 부작용인지, 우리 집 말 안 듣는 남자들 때문인지, 작품 속도가 안 나서인지... 가슴이 답답해 오랜만에 산책을 했다. 설렁설렁 느릿느릿 오리도 구경하고 꽃도 구경하며 찬찬히 걷는데, 늘씬한 아가씨가 레깅스를 입고 조깅을 한다. 너무 예뻐 나도 막 따라 뛰고 싶었는데, 이미 저~만큼 앞으로 사라졌다.
문득 내가 뛰어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
하루하루 아이들과 씨름하며 쉼 없이 뜀박질을 하고는 있는데, 오늘도 여전히 내 기록은 볼품이 없는 것 같아 코가 빠진다.
진짜 뜀박질만큼이나 삶의 뜀박질도 참 엉성하구나 싶은 오늘.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