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외출

엄마가 된 앨리스_엄마의 일기장

by 순심



백만 년 만에 서울 나들이었다.


반가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 달 전부터 마구 설렜다. 새벽부터 눈이 떠졌고, 콧노래가 막 절로 나왔다.


겨우 눈곱만 떼고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던 내가 곱게 화장을 시도했다. 마스카라가 다 굳어 있어서 난감했지만,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려 가까스로 살려냈다. 임기응변까지 아주 맘에 들었다.


우아한 차림을 할 생각으로 단정한 레이스 치마를 선택했는데, 젠장;; 치마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았다. 숨을 스읍~하고 들이쉰 채로 낑낑거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고무줄 바지만 입은 탓이었다. 쪄도 쪄도 이렇게 쪘을 줄 몰랐다. ㅠㅠ

하는 수 없이 겨우 단추가 잠기는 바지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찢청이었다. 잠깐 난감했지만, 이내 용기를 얻었다. 서울이니까 배꼽티도 아니고 찢청정도는 묻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녀석들이었다.

엄마 없이 반나절 버틸 수 있냐고 묻자,

녀석들은 라면만 먹게 해준다면 엄마가 1박 2일로 외출을 해도 괜찮다고, 사이 좋게 싸우지 않고, 열심히 줌 수업을 하며 집을 지키겠노라고 장담했다.

숙제도 알아서 다 해 놓고, 학원 갈 준비를 마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못 미더웠지만, 쿨하게 컵라면을 2개씩 허락했다.

(과체중인 큰 놈, 아토피인 작은 놈에게 좀처럼 라면을 허락하지 않아 아이들에게는 라면이 미슐랭 쓰리스타보다 고급진 요리다. ㅋ)


룰루랄라~


유후~


겨우 라면 2개로 얻은 반나절 자유, 이 화려한 외출 이란!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몸뚱이였지만, 발걸음은 막 새털처럼 가벼웠다.


이대역 앞.

와~ 이 얼마 만인가.

수능이 끝나고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촌스럽던 우리는 이대 앞 미용실에서 처음으로 빠마를 말았다.

꽃미남 오빠야가 머리를 감겨주고, 무릎을 굽혀 거울로 눈 마주치며 내 머리를 만져주었다.

"어우~ 고객님, 너무 예쁘시다."는 그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하기야 내 키가 10cm 정도 더 컸어도 미스코리아를 나갔을 텐데...' 생각하며 의기양양했었다. ㅋ

이대 앞은 죄다 낯설게 변했는데, 그때 그 미용실 간판만은 고대로 보였다. 나는 그 간판 사진을 찍었다. 함께 미스코리아를 꿈꾸었던 단톡방의 그녀들에게 전송했다.

"헐~ 개부럽."

꼼짝없이 아이들 뒤치닥꺼리, 혹은 밥벌이에 묶여 있는 그녀들이 나를 막 부러워했다.

우쭐해진 나는 미스코리아 걸음으로 약속 장소를 찾았다.


밥때도 아닌데 나를 찾아주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그들과 난 어느 때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막 행복했다.


그런데 모임이 끝날 무렵, 카톡방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큰놈은 작은놈을, 작은놈은 큰놈을 고자질 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작은놈은 곧 학원 버스가 도착할 시간인데, 숙제를 다 못했다며 아싸리하게 학원 버스를 돌려보내라고 협박했다.


집에 도착하니 집구석은 개판이었다.

온 방의 불이란 불은 다 켜져 있고, 면발로 싸대기 싸움이라도 했는지 식탁 밑엔 꼬불거리는 면발이 말라붙어있었다. 컴퓨터 비번은 어떻게 풀었는지 한바탕 게임을 한 흔적에 키보드 위에도 면발이 막 굴러다녔다.

TV는 유튜브 채널로 맞춰져 있고, 훌러덩 허물처럼 벗어 던진 옷가지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게다가 작은 놈은 엄마를 보자마자 뭘 잘했다고 배고프다고 성화인지...


...

잔뜩 쌓인 쓰레기를 버리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두꺼운 화장을 지우고 고무줄 바지를 입었다.

꿀떡꿀떡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가만 보자, 내 화려한 외출은 정녕 찰나의 꿈이었던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엉성한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