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앨리스
나는 잘 쫀다. 겁이 많고 간이 콩알만 하다.
생긴 것도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매력적인 고양이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진 '개'상이다. 몸통은 짜리몽땅 동글동글 '곰'상이고. 그러다 보니 가만히 있으면 슬퍼 보이고, 화를 내면 웃긴다.
여고 시절 영어 선생은 '미친 보라'였다.
40대 초반으로 고양이 한 마리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보라색을 좋아해 메이크업도 의상도 주로 보라색이었다. (스승의 날 그녀를 위해 우리는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를 떼창했다.)
"얘들아, 큰일 났어. 우리 반 영어, 미친 보라래."
그녀가 우리 교실에 들어오기 전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제정신'인 날은 거의 없고, 대부분 미쳐있는 상태이므로 될 수 있으면 걸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과반 전교 1등이 그녀에게 대들었다가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귀싸대기를 맞는 모습을 우리는 눈앞에서 목격했다.
나는 완전히 쫄았다.
우리 반 첫 영어 시간, 보라색 아이섀도를 한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아이들을 훑더니 키가 작아 하필 맨 앞에 앉아있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재수 없게도 첫 빠따로 내가 걸린 것이다.
영어책을 읽고 해석하라는데, 눈에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beer랑 beef가 막 뒤죽박죽 꼬였다. beef를 마시고, beer를 구웠다.
"너 나와!"
그녀가 검은색 출석부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다행히 모서리는 아니었다. 나는 더 맞을 거란 예상으로 목을 잔뜩 움츠렸다.
"들어가서 책상 밑에 꿇어앉아! 넌 의자에 앉을 자격이 없어!"
수업이 끝났을 땐, 의자에 앉아있는 아이들보다 책상 밑에 꿇어앉아 있는 애들이 더 많았고, 출석부로 얻어터진 애들도 수두룩했는데 나는 내가 우리 반 첫 빠따였다는 게 내내 고통스러웠다.
큰아들 녀석이 영어학원 시험을 망친 모양이다. 다음 레벨로 올라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며 녀석은 세상 쿨했다.
"괜찮아. 까짓거 똑같은 수업 한 번 더 들으면 되지."
나는 그 말에 화가 나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네가 최선을 다하고 시험을 망친 거면 잔소리 안 하겠다. 그런데 너는 최선은 커녕 아예 신경을 1도 안 쓰더라. 네가 단어도 잘 외우고, 숙제도 제대로 했냐.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망친 거냐. 학원 숙제한다고 컴퓨터 켜고 내둥 게임만 하지 않았냐. 그런 자세로는 수업을 한 번 더 듣는다고 될 일이 아니고, 그냥 학원을 그만둬라. 영어는 엄마가 문제집 사다가 가르쳐줄 수도 없으니 아예 그냥 영어를 때려치워라. 학원비가 아까워 엄마는 더는 못 내주겠다.
지난밤 꿈에 미친 보라가 나왔다.
잊은 줄 알았던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했다.
(애끓던 첫사랑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녀의 얼굴이 그리 생생할 일이던가)
꿈속에서 미친 보라는 내 아이의 영어 선생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식겁해서 아이의 손목을 잡고 도망쳤다.
도망치기 전에 나는 미친 보라를 향해 꽥 소리쳤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잖아욧! 당신이 뭔데!"
꿈속에선 내 눈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나는 쫄았다. 미친보라가 검정색 출석부를 들고 쫓아오는 것 같아 훌떡 잠에서 깼으니까.
제발 나도 좀 '쎈 언니'가 되고 싶다.
열나 쎄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