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재능으로 노력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나는 참 부러운 게 많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고,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부럽고, 그의 노력에는 관심 두지 않고 결과론적으로 커리어를 잘 쌓아 어딘가에 쓸모가 충분한 사람도 부럽다. 부러움이라는 감정은 정말 느끼고 인지하면 할수록 나의 그릇과는 다르게 점점 커져서 계속 계속 부러운 것들을 집어넣어도 넘쳐흐르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나 자체의 그릇이 커지는 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그릇이 그리 크지 못함을 살아가며 매 순간 느끼는 것 같은데 크지 않은 그릇에 부러움을 많이 채우다 보면 버거움이 턱 끝까지 느껴진다. 그럴 땐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를 (거짓말 안 보태고) 20번 연속으로 듣는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부럽지가 않어'가 나올 때까지.
재작년엔 친구들의 승진 소직과 연봉 협상 얘기에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출퇴근 길마다 매번 부럽지가 않아를 들었었다. 대체 나는 22살부터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일해왔던가. 인정을 받아보긴 했나? 하는 마음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돈이 인생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하고 다녔으면서, 사실 내게도 돈이 어느 정도는 중요한 보상이었던 걸 그제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효율을 누구보다 원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부러울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노력은 그만큼 하고 싶지 않으면서 갖고 싶은 욕심만 가득하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방법만 찾는 꼴이랄까. 나도 내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애써 더 행동하려 노력하지만, 늘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가 가진 것도 충분히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일이겠지만, 나의 기준과 만족이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기도.
그렇다고 내 기준을 낮춰볼 것인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 같다. 기준이 낮아지면 퀄리티가 낮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는 것은 기준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하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불행해지기도 한다.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정도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니 중간만큼이라도 하면서 사는 것 같아서 더 낮추기 어려워진다.
써 내려가다 보니 내가 스스로에게 설정해 둔 기준이 높아 부러운 게 많은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브런치에 작가로 승인받아 글을 공개할 수 있지만, 누군가 내 글을 많이 봐주지 않는 것 때문에 다른 작가님들이 부러워진다. 어딘가에서 색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지만, 디자인을 할 수 없어 야매로도 디자인을 잘하는 동료가 부러워진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운동신경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유연하지 못해 같은 초보인데 요가 동작이 잘 되는 옆 매트의 사람이 부러워진다.
브런치에 글을 공개할 수 있도록 승인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수 있고, 색을 보는 눈이 전혀 없는 것에도 만족할 수 있고, 새로 접하는 운동을 아예 못하지 않는 운동 신경이 있고, 운동 자체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도 있는데, 굳이 나는 그다음의 무언가를 부러워한다.
그리곤 내가 가진 것들이 애매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써먹기에도 애매하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질 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꾸준함이 적은 걸지도 모르겠다. 애써 행동해 놓고 애매하게 여겨져 그만두는 일이 잦았으니.
부럽다는 감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절히 활용하면 나를 성장시키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으로 내가 가진 것을 더 발전시켜 볼 수 있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 볼 수도 있으니까.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난다. 그래서 탈이 났었음을 깨달았으니, 조금씩 덜 어내며 꾸준함으로 부러움을 사용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꾸준함을 부러워하며, 나도 꾸준히 할 수 있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그것이 나는 글이면 좋겠다.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부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꾸준해지고 싶다. (근데 사실 그러려면 소재를 잘 찾는 눈부터 키워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