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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할머니.

by 써퍼


엄마의 아빠가 곁을 떠난 지 10년 후,

엄마의 엄마도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뭐 그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뵈러 가는 것을 미뤄왔나 싶을 만큼 내가 미웠다. 가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먼저 생각하는 내가 싫었다. 마지막길을 배웅하러 가면서도 기차표값을 생각해야 하는 내가 정말 정말 사무치게 지겨웠다.


장례식장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엄마를 보고 왈칵 눈물이 나려는 걸 애써 모른척했다. 일부러 조카와 더 깔깔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모두 떠난 후 할머니 사진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 미안해, 내가 미안해하는 마음만 가득 차올랐다.


입관하는 날, 하루 종일 할머니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나는 아직 안 됐어. 백번 천 번을 되뇌었다. 그래도 그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할아버지가 가시고부터 아프셨던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너무나도 힘드셨는지, 난생처음 보는 얼굴로 누워계셨다. 막상 할머니를 마주하곤 우리 할머니 아닌데, 아닌데. 차마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서 발만 쳐다봤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 손도 못 잡아드렸다.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엄마 아빠가 일하러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는 어린 나를 맡겨둘 곳이 엄마의 엄마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엄마의 언니는 자신의 엄마를 미워했다. 왜 동생의 아이만 봐주냐고.


어느 날 이모의 딸과 한바탕 싸웠다. 이모가 성질 내며 쫓아와선 막 쏟아부었다. 나의 엄마는 네가 참고 해결하라고 했다. 어린 나는 그게 못내 서러워 할머니에게 일렀다. 나의 엄마 대신 이모에게 가서 따져준 건 엄마와 이모의 엄마였다. 그래서 이모는 자신의 엄마가 더 미웠겠지.


그 와중에도 나는, 할머니가 글을 못 읽는다고 상처 주는 말을 했다. 한참 지나 엄마에게 들었는데, 마지막엔 더듬더듬 성경책을 읽으셨다고 했다. 할머니를 기쁘게 한 것도, 서럽게 한 것도 겨우 나였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은 날, 할머니한테 손주사위를 인사시키지 못한 게 속상해선 할머니 손주사위 보고가.. 하다가 아니야, 근데 너무 아프면 미련 두지 말고 그냥 가..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할머니가 곁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편안해 보이지 않고 힘겨워보여서, 그렇게도 흰머리를 싫어해 매일 염색을 하던 할머니의 머리가 다 하얀색인 게 사무쳐서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할아버지 곁으로 모셔다 두고, 엄마에게 “엄마 이제 아빠도 안 계시고 엄마도 안 계셔서 어떻게 해?” 했더니 “나 이제 고아니까 네가 나한테 잘해야지.” 하셨다. 할머니는 어떤 엄마였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부유하지 않아도 늘 베푸셨다고. 그래서 매일 집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고.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가 마지막을 요양병원에 누워 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외로우셨겠나 했더니 엄마는 말이 없었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없던 내가, 혹시라도 후에 아이를 갖게 된다면 그건 다 할머니덕일 것이다. 할머니를 보내며 나의 엄마와 아빠를 보내야 할 때를 생각하며 바뀐 생각이었을 테니.


이러면서도 삶을 살아가겠지, 그러다 또 다 잊어버리겠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할머니를 기억해 둬야지 하는 마음으로 남겨두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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