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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삼성리에서 위스키를

Samsungri (바 삼성리)

이번 글의 배경이 되는 바 이름이 삼성리여서 그런 것만은 아닌데, 오랫동안 다닌 회사의 이름과 공교롭게도 같은 부분이 있어 오늘의 글 소재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일찍이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를 봐왔던 자식됨의 영향일지, 하필 주변에 창업이나 스타트업을 꾸리는 지인들이 많아서일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대기업에서 미묘하게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나 자신을 내어주다보니 어느덧 승진은 하게 되고, 마음 한켠에서는 조바심과 걱정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되돌아보니 나의 막연한 바람은 한해한해 비슷했지만 자신의 안전지대를 벗어날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리3년차: 과장은 달아야겠지?

대리4년차: 과장 달자마자 창업해야지

과장1년차: 과장2년차 되기 전에는 진짜 창업해야지

과장2년차: 과장3년차 되기 전에는 진짜 꼭 정말 창업해야지

과장3년차: ...... (하아...)


저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며 남들이 먼저 이뤄놓은 소소하지만 돋보이는 결과물을 주변 기사에 근거하여 평가와 분석을 하는 것에 질렸었나. 그러던 중에 나도 모르게 내 자신에게 울컥했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유관부서와의 협업이 짜증이 났는지, 부서장의 등이 측은해 보였는지 알 수 없지만 돌연 휴직을 신청해버렸다.


그렇게 모올래 동료들 몇명을 꼬셔서 팀을 이뤄봤지만 휴직자와 재직자간의 밸런스와 마인드 갭이 커서 간단한 앱과 서비스를 만들어보고 바로 해체 선언. 또다른 녀석들을 꼬셔서 팀을 이뤄 다시 서비스를 기획하고 앱을 토이앱 한개를 출시하고 조금 더 진지한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만들다 내부 분열로 해체.


시스템과 인프라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람 한명한명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실전에서 내가 직접 당해보니 그 수많은 자기계발서나 구루들의 경험담에서 읽어왔던 내용들이 동시에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이렇게 말하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ㅂㅅ 내가 말했잖아'


그렇게 두번째 팀이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을 상황에 놓였을 즈음, 고등학교 선배가 여러가지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 선배는 정부 과제를 따내기 위한 사업계획서를 준비중이었는데, 기술 개발 및 UX 부분에 대한 도움과 그와 관련한 프로토타입 제작을 부탁했기에 때마침 심신이 지쳐있던 터라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연이 닿아 자주 미팅을 하며 얼굴을 맞대다 보니 회사로의 조인을 오퍼받고 결국 이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생소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덜컥 조인하게 되어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것이 있으면 화장실 청소까지라도 다 해야만 되는 그런 상황. 그게 스타트업이고 일당백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또다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쯤되니 술이 당기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마음에는 불바디에같은 묵직하고 씁쓸한 녀석이 마치 말없이 술잔을 기울여주는 옆자리 오래된 친구마냥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혼자 바를 가도 적적하지 않은 이유가 이렇게 마음에 맞는 술을 찾으면 그 헛헛한 마음이 어느정도 채워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갓 시작한 스타트업에서 정말이지 많은 것을 피부에 와닿게 배웠다. 대기업과의 차이를, 자신의 진정한 역량을, 리더쉽에 대한 고찰을, 투자에 대한 세계를, 자본의 위력을...   운이 좋아 정부 지원과제도 수행해보고, 직원을 고용하고 해고하고, VC에서 투자도 유치해보며 나름의 스타트업 업계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화장실 청소는 한동안 꽤 했다)


신선한 굴 위에 붓는 위스키는 정말이지 끝내준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많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게 되었고, 애당초 예상했던 재직 기간도 이미 조금 넘어선 터라 다시금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름을 꺼내기도 식상해져 버렸을지 모르는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Dots* 는 뒤돌아봤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계속 전진하며 점을 찍어나가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다. 한 자리에서 점을 크게 그리는 것도 의미가 있고, 작게나마 촘촘하게 또는 적당히 거리를 둬가며 그려나가는 모든 것이 나의 역사고 이야깃거리다.


새로운 일을 벌인 지 이제 겨우 만 3개월이 지난 시점에, 때 이르게 찾아온 슬럼프에 빠져 흔들렸던 마음을 다스리고자 그동안의 몇 개 안되는 점들이라도 한번 이어보며 글을 써봤는데 나름 기분이 좋아졌다.


마무리로는 글렌모렌지 시그넷 한잔이면 좋을 것 같다. 인생의 복잡함 끝엔 달달함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술 같아서.




*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 스티브 잡스



바 삼성리: 라이브 재즈 공연이 있어 시간을 잘 맞춰가면 입과 귀를 모두 즐길 수 있다. 유료 멤버십이 있으면 안쪽의 시크릿(?) 바 예약이 가능



photo by ssuroooo

이 글은 비마프(BMAF)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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