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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pr 30. 2020

꿈에서 마신 귤 주스



 과장님이 믹서기를 들고 나타났다. 수고했으니 귤을 갈아 마셔야 해. 누가 뭘 했다고요? 할 새도 없이 세팅이 시작됐다. 여름이 목전인 마당에 어디서 귤이 났냐고 물으려다 하우스 감귤이겠거니 했다. 우유와 얼음과 함께 갈리는 귤을 보며 왜 하필 귤이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유리잔 가득 주황색 액체가 내밀어졌다. 자, 짠! 무슨 화면 전환이 이렇게 숨 가쁘냐, 얼결에 잔을 부딪히려는 순간. 짠하고 꿈에서 깼다.




- 얼마나 힘들었음 그런 꿈을 꿔 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근해서 메신저로 엘리(과장님)에게 꿈 얘기를 했다. 오고 가는 키읔 사이 수맥처럼 흐르는 노동자의 애환. 그 짠하고 우스운 꿈에 별 다른 말은 안 했지만 요 며칠 제안 준비로 이어진 야근이 원인인 건 확실했다. 그런데 진짜 왜 하필 귤이지, 맥락 없는 소재에 의아했다가 그렇게 뜬금없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어제 야근 식대로 산 갈배사이다를 엘리가 마시라고 나눠준 게 귤의 탈을 쓰고 나타났을 뿐. 비타민 씨가 부족한 건가. 포장도 안 뜯고 찬장에 넣은 종합 비타민을 먹어야겠다. 물론 이 다짐은 곧 까먹을 것이다.




 회사 일이 꿈에 나오는 건,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있는 일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깰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게 공통점. 작년 겨울엔 담당하고 있는 브랜드의 A 대리님이 꿈에 나타났다. 와, 주연이 아이돌인 꿈을 꾸던 때도 있었는데 클라이언트로 바뀌다니 인생 참 너무 한다. 꿈이 으레 그렇듯 앞의 얘기는 다소 허무맹랑했던 것 같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인트로를 뚫고 나타난 대리님은 '주임님, 지금 준비하시는 프로모션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준비 잘해주셨는데.. 너무 죄송해요.' 라며 평안한 표정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정말, 놀라서 깼다. 천장을 보며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데에 더딘 시간이 걸렸다. 꿈이 맞는지를 가늠하느라 메일함까지 열어봐야 했다. 정말 혹시나, 그녀가 밤 사이 마음이 바뀌어 취소 통보를 했을까 봐. 그즈음 진행하고 있던 커피 브랜드의 프로모션은 업무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준비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던 프로모션을 취소한다는 얘기는 비록 꿈이었음에도 아침부터 뒷목 잡게 만들었다. 설마 예지몽은 아니겠지. 오픈 당일까지 괜한 조바심이 따라다녔다.



 어릴 적엔 나름 모험심 가득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외계에서 온 괴생명체가 지구를 침범해 친구들을 구출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얘기나, 좋아하는 아이돌이 꿈에 나타나시어 친히 데이트를 해주겠다 하여 영영히 깨고 싶지 않을 내용 같은 거. 시간이 흐르면서 주제도 변해갔다. 회사 일, 회사 사람, 클라이언트, 만나는 사람, 집안일. 그즈음 신경 쓰고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일들로. 그런 것들이 툭툭 나올 때면 깨닫는 거다. 아, 지금 나 스트레스받고 있구나.



 처음 회사 사람이 꿈에 나왔을 때는 기분이 그랬다. 아니 사무실에서만 잔소리하시면 됐지 왜 애먼 꿈까지 침범을 하시냐고요. 그러다 조금씩 업무와 관련된 꿈들이 이어졌다. 다음날 아이디어 미팅이 있을 땐 꿈에서도 아이데이션을 했고, 전날 실수를 했을 때는 그걸 끊임없이 반복하는 악몽을 꿨다. 꿈이 지속되는 시간 내내도 괴로웠지만 깨었을 때는 더 울적했다. 하다못해 무의식의 영역에서까지 나를 휘젓고 다닌다니. 깨서도 일하고 꿈에서도 일하는데 이러면 돈을 두배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현대 사회가 아직 꿈의 영역을 노동으로 쳐주진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잠들고 나서도 이어지는 일상의 일. 스트레스는 근본적인 원인을 잘 없애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런 면에서 영영히 해결하지 못하고 휩쓸리듯 살 것만 같았다. 내내 달고 사는 위염과 두통이 도질 때마다, 아 나는 또 이렇게 취약하게 졌구나. 업무와 일상을 분리하지 못하는 인간. 나는 패잔병처럼 무기력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알았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잘하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은 하지 않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잘하려고 해도 실수하고, 열심히 한다고 후회 없는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 몇 번의 넘어짐을 지나서야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면 그 뿐이라는 일터에서의 순리를 깨닫는다. 그러니 문득 꿈에서도 쫓아다니는 클라이언트의 목소리와 미팅 씬은 그걸 정말 잘 하고 싶어 툭 불거져 나온 마음이겠거니 하곤 잊어버린다.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보다는 해내고 싶다는 열망에 더 집중하기로 한다. 쉬어야 할 시간에 잠시 침범한 뜨끈뜨끈한 마음의 온도. 힘든 일들은 어떻게든 지나갈 것이고, 어떤 것도 결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행이다. 꿈에서 조차 귤을 갈아주겠다는 선배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아직 꿈에 나오진 않았지만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다 알지는 못해도 그들의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도 치열한 미팅과 투쟁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혹 그들의 꿈에도 내가 나온다면, 그 속에서의 나는 부디 그들에게 달고 시원한 귤 주스를 갈아 줄 수 있는 응원의 존재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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