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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an 12. 2019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의 함정

나와의 종전선언

일을 하는 관계에서 설렘을 유지시키려면 권력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가 아닌, 오직 함께 일을 해나가는 동료임을 알 때, 설렘은 지속될 수 있다. (노희경,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작년 한 해, 직업인으로서의 나는 행복했다. 일의 재미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끔찍했던 야근이 때로는 설렐 정도였다. 일의 의미가, 이 일이 가진 소명이라는 것이 조금씩 구체화되어갔다.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이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였는데 이제는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간 그린 밑그림에 세밀함을 더하고 칠하기만 하면 됐다. 불안했고 그래서 불안정했던 1년 차를, 2년 차가 결국 이겨내고 만 것이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3년 차로 접어든 최근의 나는 멀리서 보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 가까이서 보면 통신 상태가 불안한 휴대폰 화면처럼 버벅거리는 사람이었다. 새롭게 들어간 제안을 준비하는 내내 무엇 하나 명확하게 '이건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제안서 쓰는 게 좋다고, AE를 잘하고 싶으니 AE 시켜달라고 팀장님에게 당차게 선언한 지난 날을 후회했다. 그 덕에 말은 함부로 뱉는 게 아니라는 배움을 얻었다.


 세부 제안서와 콘텐츠를 기획하는 내내 문장이 하나도 써내려 지지 않았다. 마침표를 맺지 못하고 백스페이스에 사망한 산더미 같은 문장들이 가여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보내. 이걸로 뭘 할 수 있어. 그랬다. 일에서 설렘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노희경 작가의 말마따나 권력관계가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클라이언트조차도 권력을 주장하지 않는데, 어디서 이 상하관계가 생겼을까.



 그리곤 알았다. 알아채고 말았다. 일과 나 사이에, 정확히는 '일하는 나'와 '일을 잘해야 하는 나' 사이에 권력관계가 생기고 만 것이다. 제안을 준비하는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잘은 모르겠지만, 설렘이 사라진 걸 그들은 알았었나 보다. 불안해하지 말고 확신과 신뢰를 가지라며 팀장님은 옆에서 말씀 구절을 읽어주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선배는 위로했다. 그렇지만 모든 말은 머릿속을 통과해 뒤로 스러졌다. 그들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였다.



 왜 나는 일을 못할까. 왜 나는 일을 못하는 나를 인정하지 못할까. 나는 왜 이럴까. 아니 애초에 일을 잘했으면 됐는데. 그러면 왜 나는 일을 못할까. 종국엔 이 모든 일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써놓고 보니 이보다 더없이 멍청한 생각이 없지만, 생각의 고리는 당최 끊어지지 않고 괴롭힘을 이어갔다. 잘한다의 기준이 없다는 걸 안다. 그건 아주 모호하고 또 변덕스럽다. 제안서엔 늘 KPI가 붙어 가지만, 그게 뭐라고. 그걸 달성하면 잘 한 건가? 못하면 못한 건가? 아는데, 아는데도 불구하고 클라이언트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부담으로, 남의 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핑계로, 같이 일하는 이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단 치기로 '일 잘하는 AE'에 대한 신화는 몸집을 부풀려갔다. 결국은 성급한 것뿐이면서. 그래서 이토록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면서.



그리고 때론 설렘이 무너지고, 두려움으로 변질되는 것조차 과정임을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노희경,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싸움의 대상이 명확해졌다. 적이 그 누구도 아닌 나임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실은 잘 모르겠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싶진 않은데, 그렇담 화해해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어떤 방식으로 악수를 청해야 응해줄지 지금은 미지수다. 다만 이 모든 분투가 두려움을 다시 설렘으로 바꾸는 과정임을. 설렘은 반드시 스러진다는 믿음을 부정하고, 설렘을 지속시키기 위한 시간임을 믿기로 했다. 이 믿음의 끝에 내가 화해에 성공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잘하고 싶은 나와의 종전을 선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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