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
얇은 셔츠 차림으로 OT를 받았던 프로젝트가 겨울을 맞았다. 시작할 즈음만 해도 손 선풍기를 끼고 살았는데 출근 지하철의 패딩족들 사이로 내 둔한 롱패딩을 끼워 넣는 게 벌써 익숙해졌다니. 바뀐 계절은 이제 이 프로젝트에도 끝이 왔음을 의미했다. 못내 섭섭하다. 그런데 이 '섭섭하다'는 감정이 너무 낯설어서 뭐랄까,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선한 감정이었다.
마무리, 끝. 언제부턴가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든 끝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그게 아끼는 물건이든 강아지이든 혹 사람이든, 영원하고 싶었던 모든 관계엔 늘 끝이 있었다. 그게 끝이 나면 내 인생도 다 아작이 날 거야. 난 망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웬걸. 생각보다 나는 씩씩한 인간이었다. 끝에 대한 절망은 아쉬움과 섭섭함으로 희석되다 결국 인생 어느 시점에 있던 일들 중 하나로 바뀔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든 느끼는 감정은 늘 같았다. 시원 섭섭에서 '시원' 조차도 아니었다. 음, 그렇네. 이렇게 또 올 것이 왔구나. 자연스럽게 새 프로젝트의 제안과 운영이 시작되면 뇌 용량을 차지하고 있던 철 지난 일들은 저절로 shift+delete 행이었다. 2년을 꼬박 그랬다.
그런데 올 7월부터 시작했던 이 프로젝트는 마무리, 끝이라는 단어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진다.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마냥 질척거리고 싶어 진다. 연말이 왔음을 알리는 번쩍거리는 트리 장신구에 괜히 내 마음도 일렁거려서일지. 일렁거리던 차에 괜히 프로젝트에 감정 이입이라도 한 건지.
여러모로 남다른 프로젝트이기는 했다. 드라마 홍보를 위한 소셜 마케팅이라는 프로젝트의 낯선 형태가 그랬고, 제안부터 실행까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자식 같은 프로젝트라는 점이 그랬다.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무엇을 해도 재미있고 설렜다. 늘어나는 드라마의 팬들과 좋은 평가는 확실한 당근이었다. 아하, 나는 드라마 마케팅에 최적화된 사람은 아닐까? 이렇게 내 새로운 재능과 커리어를 발견하게 되는 건가! 속으로만 그친 생각들도 여러 번이었다. 답지 않은 감정들의 이유를 어영부영 12월의 탓으로 돌리고 있던 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고 말았다.
내년부터 시작해야 할 새로운 소셜 운영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 첫 미팅 날.
정식으로 메인 AE 키를 잡아야 하는 첫 프로젝트였다. 꽤 무덤덤한 성격이라고 생각했건만 눈 앞에 배달된 건 두려움 반, 떨림 반, 걱정 많이. 한 것도 없이 OT만 받은 미팅에도 진이 다 빠졌다. 골골거리며 돌아오는 길, 대표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불쑥 그 드라마 프로젝트의 얘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 클라이언트랑은 요즘 어떻냐, 요즘 반응은 어떻냐, 리뷰 보고는 언제 하냐. 툭툭 던지시는 질문에 아는 선에서 대답하느라 진땀을 빼던 찰나였다.
"너네 TF 요새 참 좋아 보인다. 재밌게 일하는 게 눈에 보여."
역시 제가 드라마 마케팅에 최적화된 사람은 아닐까요? 꺼내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을 때 대표님은 그런 말을 덧붙였다.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잘했던 일의 성과가 남을 것 같은데, 나중에 그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냥 그때 일했던 클라이언트, 동료, 사람들이 남더라고."
그가 얼마나 좋았던 사람이었는지가, 나는 그와 일하며 얼마나 행복했는지가. 그런 것들이 남는다고 말이다. 그 얘기에 알게 된 거다. 아마도 나는 때로는 막막했고 때로는 숨 막혔고 때로는 머리 아팠던 이 프로젝트가 아닌, 그 버거움을 같이 짊어진 이 사람들에게 질척거리고 있었구나, 하고.
끝에 대해 무덤덤한 성인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들과 끝까지, 무엇이든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여러 TF에 속했다, 빠졌다를 반복하며 언젠가는 마음이 꼭 맞는 사람들과의 일하게 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몇 개월간의 소중한 시간이 연기처럼 스러지는 게 못내 섭섭했고 아쉬웠던 거다. 다시는 이 구성으로 일을 하긴 어렵겠지. 어린애 같이 징징거리는 맘으로.
그리고 지난 금요일. 새롭게 시작하게 될 프로젝트의 제안 TF가 꾸려졌다. 제안부터 실행까지 쭉 살림을 꾸려야만 하는 AE의 옷을 지금 입어도 되는 걸까. '전 AE를 잘하고 싶어요!'라고 팀장님에게 호기롭게 선언했던 지난날의 나를 몹시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TF는 이미 꾸려졌고 제안서는 어떻게든 나와야만 하니까.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간 제안 TF와의 킥오프 미팅. 안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은 여전했지만 어느 순간 안심했다. 알아서 잘하라고 하시지만 내 징징거림을 최전방에서 받아내 줄 팀장님과 선배 E,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주며 빛나는 눈으로 프로젝트에 몰입해 줄 S와 K 그리고 막내인 I까지. 처음으로 합을 맞추게 될 사람들이지만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아이디어라는 동일한 열망으로 달려갈 사람들과 어떻게든,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번에도 무감각한 마무리가 아닌 적당한 섭섭함과 질척거림이 한가득인 끝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올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는 지나간 안녕을 뒤로하고 새로운 프로젝트와 안녕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