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고 쉬운 존재로 불리우는 기쁨
입사하기 전 영어 이름을 지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회사원이 영어 이름 하나쯤 갖는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은 '이봐 토마스, 여기 2번 장표에 오타가 있다구!', '이런, 에이미. 그걸 발견하다니 대단해!' 하는 대화가 실제로 오고 갈 것이란 상상은 나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
닉네임을 정해서 보내달라는 경영기획팀의 메일에 회신하는데까지 꽤 긴 시간이 소요됐다. 알고 있는 영어 이름을 총동원하고 포털에 '여자 영어 이름' 같은 걸 검색하며 영양가 없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영어 이름이라고 하면 꼬리표처럼 붙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수'. 내 한글 이름의 가운데 글자만 뽑아낸 단순한 이름.
이 이름의 역사와 기원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바짓바람의 새역사를 쓰던 아빠 덕분에 원치도 않던 회화 학원을 다녀야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아버님, 저는 외국인이 무섭습니다, 라는 나의 애원을 담아 약간의 반항을 해봤지만 안산 바짓바람의 새역사에게 통하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동생과 함께 다니는 것으로 합의를 봤고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지만 정신차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수(Sue)가 되어있었다.
그땐 내 이름이 참 별로였다. 옆 반 여자애들은 스펠링도 길고 발음도 뭔가 있어 보이는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스나 에밀리나 그런 거던데, 수라니. 무색무취. 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 이름을 써야할 순간은 종종 찾아왔다. 대학교 원어민 수업을 들을 때나 영어권으로 여행을 갔을 때나. 사실, 내 진짜 이름도 아니고, '내 이름은 라푼젤이야!'라고 한들 누가 그 진위를 알겠어. '이름 참 별..' 하고 말겠지. 그런데 붙여 보고 싶었던 예쁜 이름들은 어딘가 어색했다. 사이즈가 미묘하게 어긋나서 불편한 신발을 억지로 신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결국엔 그때마다 그 무색무취의 이름으로 답했다. 내 한글 이름은 이런데 영어로 그냥 수라고 불러,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다시 입사하기 전으로 돌아가면, 뻔한 멜로 드라마의 결론처럼 결국 메일에 써서 보낸 이름은 수였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나 멋진 영화 배우의 이름을 붙일까 생각도 해봤지만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될 이름이라고 생각하니 목 뒤가 좀 간지러워야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불편하지 않게 나와 꼭 들어맞는 이름을 골랐다. 한 번 들으며 여간해선 잊어버리지 않는 그런 이름인 수. 바람을 입으로 후 불어내듯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고, 내 원래 이름 세글자도 함께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한켠에 담아. 그리고 그렇게 쉬운 내 이름처럼, 내 존재가 그랬으면 했다.
일을 하자고 얘기할 때에도, 밥을 먹자고 할 때에도, 누구나 툭툭 불러도 괜찮은 그런 사람. 잘은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 그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 이름은 수야' 라고 말하는 순간이 앞으로는 제법 더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