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아 Aug 15. 2019

한여름의 에어컨 청소

어쨌든 해냈다



손에서 수영장 냄새가 난다. 몇 번을 벅벅 문질러 닦았는데도 락스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불쾌한 향에 인상을 잔뜩 쓰면서도 계속 손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마다 하나쯤 변태적인 면이 있다.


졸업한 고등학교엔 수영장이 있었다. 1학년들에겐 수영 수업이 필수였는데, 아빠는 좋아했고 나는 싫어했다. 나중에 물에 빠지면 넌 수영 못해서 익사할 거라며, 기본적 생활의 지혜가 결여된 한심한 애 취급하는 아빠에게 '애초에 물이 싫어서 들어가지도 않는데 익사할 일이 어딨냐'라고 대들려다 말았다. 고등학생 땐 참 착했지. 지금처럼 말대답도 안 하고.


호불호가 불분명한 '아무거나'적 인간에게도 극불호인 게 하나 있다면 물이다. 물에 관련된 웬만한 건 다 싫다. 들어가는 것도 싫어하고, 내리는 것도 싫어하고, 심지어는 마시는 것도 싫어한다. 일주일 전에 산 2리터짜리 생수는 여전히 바닥을 보일 기미가 없다(와중에 바다 구경엔 왜 환장을 하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공기마저 물기가 스며있어 들이쉬고 마실 때마다 폐 속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수영장은 사이사이 소독약 냄새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완벽한 공간이었다. 완벽하게 싫은 공간.


이러니 덥고 습한 여름을 싫어하는 건 필연적이다. 자취 첫 달은 전기세가 무서워서 에어컨을 켜기 무섭게 껐다. 암암, 선풍기가 최고지. 역시 돈은 모든 공포를 이긴다. 막상 받아 든 고지서에 찍힌 숫자는 고작 삼천백 원. 호오,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집에 들어와서 잠에 들기 직전까지 에어컨을 끼고 살았다.




/

사건 당일은 평소처럼 침대에 드러누워서 핸드폰이나 보고 있던 퇴근 후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마주친 건 활짝 열린 에어컨 덮개의 아랫면. 평소에는 들여다볼 일이 좀처럼 없는 곳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운명의 상대와 우연히 눈을 마주치면 그런 기분일까. 생각이 멈추고 말이 안 나오고. 덮개 아래 촘촘히 박힌 정체불명의 까만 점들이 뭘까 3초 정도 생각하다 누운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곰팡이. 분명 곰팡이였다.


여기서 문제. 혼자 사는 게 처음인 사람이 곰팡이를 처음 만나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1번 침착하게 곰팡이 청소법을 알아본다, 2번 모르겠고 일단 닦는다. 아빠 말마따나 내게 생활의 지혜 같은 건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게 분명하다. 속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물티슈로 까만 것들을 벅벅 닦아냈다. 휴지에 까만게 묻어나왔다. 보이는 곰팡이들도 없어졌다. 곰팡이 지우기 힘들다더니 뭐, 별 거 아니네! 가뿐한 마음으로 다시 에어컨을 틀었고 그게 참사의 시작이었다.


다음날 아침, 에어컨 아래 까만 정체불명의 (곰팡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부스러기들이 쌓여있었다. 어쭙잖게 뜯겨서 에어컨 속에 남아있던 것들이 바람에 같이 날렸나보다. 젠장. 이럴 때 사람들은 인류애를 잃는다는 말을 쓰는구나. 독립을 하고 삶의 질이 늘어야 하는데 욕도 같이 는다.


자취를 시작하면 가장 많이 하게 되는 일은 검색이다. 검색어들은 대부분 생애 최초의 단어들이다. 이를테면  '에어컨 청소법', '에어컨 곰팡이', '에어컨 셀프 청소' 같은 것들. 나는 정말이지, 에어컨에 냉방 기능만 있음 됐지 왜 그렇게 쓸데없는 기능이 많은지 이유를 몰랐다. 송풍이라는 게 차가워진 공기를 뱉던 에어컨 안에 만들어진 습기를 빼내 곰팡이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건 30년 만에 처음 알았단 말이지.


그동안 에어컨 청결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관심이 없던 게 의아할 정도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연락을 할 순 없었다. 내게 일이 생기면 백배 정도 부풀려서 심각하게 만드는 박 권사 성격에, 에어컨 곰팡이 청소가 건강 문제로 부풀어 오를 게 뻔했다. 업체를 부를까 했지만 두 달 전 입주 청소를 맡겼다가 돈을 공중분해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만뒀다. 대신 '분해 없이 에어컨 청소하는 법'이라며 '오늘의 집' 어플서 찾은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압축 분무기와 락스 희석액으로 곰팡이를 불려서 떼어내는 법인데, 건조 시간 빼고 1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에 혹했다. 그 정도면 광복절 휴일 오전을 알차게 보내기에 적합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전 10시에 시작한 청소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아니, 청소 숙련도 같은 건 왜 고려를 안 하고 난이도를 매기는 거야.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락스 희석액에 바닥은 물바다가 됐다. 분무기에서 흐른 물이 손과 팔을 다 적셨고, 젓가락에 휴지를 감아 남은 곰팡이를 닦아내느라 팔에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집에 있는 수건과 걸레를 전부 꺼낸 소동 끝에 얻은 건, 어쨌든 끝난 청소와 (여전히 휴지로 닦을 때마다 까만 먼지가 묻어 나와서, 여름이 끝나고 업체를 부르기로 맘먹었다) 락스 물로 얼룩덜룩 해진 민소매 티 (잠깐 생활 정보. 까만 천에 락스가 묻으면 갈색으로 변한다. 이 민소매를 걸레로 쓰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그리고 절반밖에 남지 않은 키친타월. 아 키친타월은 비싼데. 괜히 속이 쓰렸다.


청소를 대강 끝내고 매트리스에 드러누웠다. 집에 가득 찬 락스 냄새 때문인지, 몸에 힘이 쑥 빠져서 인지. 꼭 한 바탕 수영을 마치고 난 기분이었다. 구석에 대충 던져 놓은 젖은 수건 더미와 휴지 뭉치들을 모른 척하고 에어컨을 노려봤다. 습한 게 싫어서 에어컨을 끼고 살았더니 정작 저 안에 곰팡이를 키우고 있었다니. 그래도 해냈다. 에어컨 청소. 환기하느라 열어놓은 창문 밖에선 태풍으로 비가 내렸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열일곱 내내 수영은 억지였다. 싫은데도 꾸역꾸역, 억지로 해야만 했다. 그렇게 일 년을 꼬박 하고 나니 수영이 늘었다, 로 해피엔딩이 되면 좋은데 여전히 나는 물이 무섭다. 아마 그때 받은 체육 내신이 8등급. 필기시험은 한 개인가 틀렸던 것 같은데 그놈의 자유형 실기를 하는 날. 나는 물을 잔뜩 마시곤 중간 레일부턴 눈도 못 뜬 채 걸어서 시험을 마쳤다.


그 억지스러운 시간에도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가 있다. 물 위에 몸을 띄운 채 수영장 천장을 바라봤던 기억. 수영은 싫었지만 그건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웅웅 울리는 수영장의 소음도 줄어들었고 싫은 물 냄새도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물에 몸을 맡긴다는 게, 뭐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내 방 에어컨은, 안 그래도 해가 들지 않는, 안 그래도 습한 데다 바깥공기도 잘 안 들어오는 이 망할 놈의 6평에서 다시 곰팡이를 피워낼 거다. 솔직히 에어컨을 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켰는데 또 까만 게 날아다니면? 나는 또 인류애를 잃고 하릴없이 청소업체를 부르겠지.


그럼에도 엉망진창 청소를 하는 와중에 기억 하나가 쌓여서, 오늘은 19년 광복절이고, 노동요 삼아 틀어놓은 스포티파이가 추천해 준 음악이 하나 같이 좋았고, 청소의 제물로 바쳐진 수건과 걸레를 털레털레 들고나가 코인 세탁기에서 돌리는 동안 읽은 임경선의 '다정한 구원' 덕에 다시 리스본에 가고 싶어 졌고, 뽀송하게 건조된 빨랫감의 향기가 참 좋았고. 이 모든 감각을 넘어 어찌 됐든 스스로 한 가지 일을 해냈다는 기억.


사람은 기억으로 산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넘어온 습한 비 냄새와 락스 냄새를 맡으며 마친 이 사소한 성취. 이 작은 것이 또 나를 살게 할 거다. 에어컨 곰팡이와 며칠을 씨름하게 만든 이 6평의 집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