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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Jan 05. 2020

위층, 안녕하신가요?




 또 들린다. 독립하고 엄마 목소리보다 더 자주 듣는 목소리. 매트리스 구석에 던져둔 폰까지 겨우 기어가 확인하는, 별고 알고 싶지 않은 숫자 1:33. 천년의 쌍욕이 나오지만 그것도 청취자 없음 맥 빠진다. 싸우려면 좀 훤한 대낮은 어떠실까요, 듣는 사람도 적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하소연 두어 번 하다 말았다. 생각해보니 대낮에도 열심히 싸우는 부부 아닌가. 소음이 없어지길 기다릴 바엔 귀 닫고 다시 잠드는 게 빨라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노이즈 캔슬링이 썩 훌륭한 이 콩나물 대가리들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살 때는 미처 몰랐지.



 현재 거주하는 빌라엔 주인집을 포함해 (아마도) 8세대가 살고 있다. 4층짜리 건물 맨 위엔 주인집이 살고 있는데 입주 당시는 이게 큰 의미로 다가오진 않았다. 방에 일 생기면 바로 뛰어올라가면 되는 건가, 그 정도의 감상. 같은 층 주민들은 이따금씩 그 집 앞에 놓인 쓱배송 노란봉투나 쿠팡박스가 아니면 공실이라고 믿어도 될 정도로 고요한 생활을 했다. 입주 초반, 방음이 진짜 잘 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게 얼마나 멍청한 말이었는지 깨달은 건 약 3주 뒤였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폭탄처럼 떨어진 격양된 중년 여성의 목소리. 문제는 그게 상식 수준을 넘어 크게 들린다는 데에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누가 방에 TV라도 들인 줄 알았지 뭐야. 3주간 조용했던 빌라의 최초의 소음. 근원지는 위층이었다. 인자하게 웃으며 내 부탁을 다 거절하던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목소리 위에 겹쳤다. 간간히 대꾸하는 풀 죽은 남자의 목소리는 주인아저씨의 것이 분명했다. 단점 많은 이 집에 또 다른 단점이 추가되는 소리였다.


 엉망진창인 층간 소음의 정점은 그거였다. 때는 밤 열 시. 잠에 들기 좀 이른 시간이라 의미 없이 핸드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은 내 손에 있는데 진동 소리가 난다고? 아, 그건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이 부지 중에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음. 그날 많이 피곤하셨는지 주인아저씨의 코골이는 우렁차도 너무 우렁찼다. 아무래도 설계 때 21세기 이웃 간 관계 단절을 타파하고자 방음을 포기한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건물 방음이 이럴 수 없는 거였다. 아빠 코 고는 소리도 아득한데 주인아저씨 수면 건강을 걱정하게 되다니. 한 번은 막대기 같은 걸로 천장을 칠까도 했다. 확 씨, 어디 한 번 다퉈봐? 층간 소음 보복 범죄가 멀리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주인집 부부를 몇 번이나 뵈었을까. 으레 드라마에선 주인집이 밀린 월세나 관리비 때문에 세입자를 들들 볶는다던가 별일 없냐며 세상 참견 다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게 정말 드라마일 뿐이란 건 주인집과 면대면한 횟수가 고작해야 계약서 쓸 때 한 번, 입주 날 한 번, 어쩌다 오고 가며 두어 번 정도임을 세어보고 느꼈다. 물론 아직까진 성실한 세입자라서이기도 하다만, 기묘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적지 않은 돈(사실 엄청 큰 돈)과 작지 않은 공간(작다. 엄청 작다)을 거래한 사이에, 얼굴은 집 근처 편의점 알바생보다 적게 보면서 목소리는 매일 같이 듣고 있으니.


 어김없이 싸우는 소리가 들릴 때면 궁금증이 생긴다. 어떤 일이 그녀를 이토록 자주 화나게 만드는 걸까. 알 방법은 없다. 뭉개지고 어그러진 소음에 불과한 대화는 언제나 나를 애매한 위치에 세우기 때문에. 소리로 그들의 다툼이나 무사함을 공유받지만 그 이상의 간섭은 허락되지 않은 경계에, 내가 서있다. 그들의 생활에 강제로 초대받은 보이지 않는 타인. 21세기의 위층과 아래층이라는 건 이토록 기묘하기 짝이 없다.



 지난 주말엔 동네 마실이라도 가시는지 계단에서 내려오는 주인집 부부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가는 인사엔, 네 안녕하세요, 오는 인사가 전부였다. 얼마 전 부부싸움은 세상에 없던 일인 것처럼 그러나 다정하지는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부부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위층의 안녕을 빈다. 이기적이지만 그게 곧 나의 안녕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이 부디 화목하고 평안하길 기도한다. 되도록 싸움은 낮에 하시고 코골이도 좀 덜하시길, 하는 현실적인 문장도 슬쩍 끼워.







(졸지에) 층간 소음을 위한 21세기 최고의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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