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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03. 2020

우리의 서울

 


 초등학교 4학년 체육 시간은 늘 선착순 달리기로 시작됐다. 운동장 반 바퀴를 뛰어 등수에 들지 못하면 다시 뛰어야 하는 기합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살아남지 못했다. 뛰다 보면 이따금씩 머리가 빙글 돌기도 했다. 비루한 체력 탓이겠거니 넘기던 와중 일은 갑자기 터졌다. 시야가 모래색으로 변하더니 의식이 끊겼다. 야, 나 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 흥분한 짝의 브리핑 속 나는 운동장 위를 데구르르 굴렀고 그건 영화 주인공이라기보단 돌멩이에 가까웠다.

 

  담임은 수아가 갑자기 쓰러졌다며 집에 알렸다. 상당한 비약이 있는 설명이었지만 달리다 쓰러진 게 창피해 엄마에게 더 설명하진 않았다. 엄마는 그 길로 나를 병원에 끌고 갔다. 예상대로라면 그 진료는 한 번으로 그쳐야 했다. 두세 번의 진료가 더 있고 의사 선생님은 작은 종이에 이름과 번호를 적어 건넸다. 받아 든 아빠도 옆에 있던 엄마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서울대병원으로 외래를 다녀야 했다. 선생님 얼굴은 가물가물 하지만 펩시 마크가 그려진 테이크아웃 잔이 쌓여있던 기억은 또렷하다. 의사 쌤이 콜라를 저렇게 마셔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며 나를 내보냈다. 몇 번의 외래에도 마지막은 같았다. 나 많이 아픈 걸까. 차마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말해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금이야 ‘자가면역성 간염’은 검색만 해도 나오지만 당시 아동에게 흔히 생기는 질환은 아니었다. 케이스가 없었으니 함부로 진단을 내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했다. 채혈과 CT로는 확인이 어려워 결국 조직 검사가 이뤄졌다. 인생 최초의 입원에 흥분해 앞으로 벌어질 일 같은 건 짐작도 못했다. 아빠가 가져다준 만화책을 보며 심신 안정을 취하고 있던 검사 전 날, 레지던트 선생님이 종이를 들고 찾아왔다. 동의서의 빽빽한 글씨를 짚어주며 조직 확보를 위한 주사의 크기와 그게 뚫고 지나갈 갈비뼈의 번호, 주사 바늘이 폐를 찌를 가능성 그리고 응급조치에 대해 설명했다. 갈비뼈 번호까지는 끄덕이던 고개가 멈췄다. 뭘 뚫는다고요? 폐요? 희박한 의학적 확률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로 영화 한 편이 뚝딱 나왔다. 결국 엄마를 붙잡고 오열했다.


  엄마 나 무서워, 검사 안 할래, 폐 구멍 나면 어떡해, 엉엉. 하나님, 저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동생이랑 안 싸우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살려주세요 엉엉. 인생에서 가장 간절히 기도한 순간이었다.


 조직 검사는 무사히 끝났지만 말 그대로 검사에 불과했다. 면역력을 돕는 최소한의 약과 추적 검사. 그 소극적인 대처를 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일 년에 대여섯 번은 서울에 가야 했다. 안산에서 서울까지 왕복 네 시간의 이동이었지만 철 없던 어린이는 좋기만 했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엄마가 사주는 요플레와 돈가스 같은 게 좋았다. 가난에 찌든 동네에 살다 서울에 나오면 내 삶도 바뀌는 것 같았다. 나중에 크면 꼭 서울에 살아야지, 마음먹게 했다. 무엇보다도 바쁜 엄마가 같이 있는 게 좋았다. 그래서 엄마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은 시간인 줄만 알았다.

 

 엄마와 통원 시절의 얘기를 하게 된 건 공식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고 난 이후부터였다. 스무살이 된 해의 겨울. 엄마와의 약 냄새 나는 서울 나들이가 끝 나기까지 꼬박 9년이 걸린 것이다. 어느 날 엄마와 얘기를 하가 조직검사 전날 풍경이 화두로 떠올랐다. 동의서를 받으러 온 선생님 덕에 두 배는 더 무서웠다며 너스레를 떠는 내게 엄마는 툭, 그러는 거다.

 



- 너 조직 검사할 때 선생님이 병실 안에 있어도 된다 그랬거든? 근데 못 있겠더라. 못 보겠더라고. 복도에 나가서 그냥 계속 서있었어. 아빠도 출근해서 나 혼자 있는데, 그때 너무 무섭더라.




 채혈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바늘 쪽은 보지도 못하던 마음을, 홀로 외래실에 남아 선생님과 나의 이야기를 했어야 했던 마음을, 문 밖에서 기다리는 딸을 만나기 전 표정 관리를 해야만 했던 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올까. 병실 복도에 서서 울었다던 서른 여덟 여자의 마음을 당분간 알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작년 겨울, 뮤지컬 표를 예매했다고 엄마를 서울로 불러냈다. 직장 생활로 독립을 한 이후부턴 일부러라도 엄마와의 데이트를 잡곤 한다. 안산에서 지하철로 온 엄마는 길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아냐며 툴툴댔다. 한참을 거울 앞에서 고민했을 게 뻔한 차림새를 하곤 그렇지 못한 태도에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받아쳤다. 날이 좋았다. 늘 병원 콘크리트 벽 색이던, 엄마와 나의 서울. 실은 이 도시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색이 있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뮤지컬을 보기 전 점심부터 먹었다. 두 명이서 시키는 세 접시. 다 못 먹는다고 만류하는 말에 많이 시키고 남기면 부자 같아 보이지 않겠냐며 우겼다. 배부르다는 사람 손에 굳이 커피를 쥐어주는 것까지 욕심을 부렸다. 많이 못 먹는다던 엄마는 처음 먹어보는 롤케이크를 절반 가까이 먹고선 멋쩍어했다. 배우들 얼굴이 잘 안 보인다고, 노래를 참 잘한다고 말하는 문장의 끝은 평소보다 높은음이었다.


 가는 길이 머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재차 권유했지만 멀미 나서 싫다는 고집에 결국 졌다. 지하철로만 꼬박 한 시간 반 거리가 걱정됐지만 '내가 애냐’는 말에 '그건 그렇다'라고 웃었다. 엄마는 작은 몸을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곤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알았다는 대답과 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열차 꼬리칸이 역사를 모두 빠져나가자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서울의 오후. 계단을 오르며 오늘 우리의 서울의 색도 그러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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