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간사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이력서의 많은 의미들을 생각하고 더 이상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의 글을 쓰고는 결국 나는 그 이후로 또다시 이력서를 쳐다보지 않았다.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왜 선인군자라는 말이 생겼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며칠 전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평온함 속에서 나의 이력서를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그렇게 이력서가 끝나갈 즈음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취미", "특기"....... 내용만 봐서는 나의 이력서 내용의 중요도 면에서나 나를 평가하는 데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할 것 같은 항목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 중요도와 다르게 이력서를 작성할 때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없다'라고 쓰기에는 평가에 있어 사회성이나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데 투자를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고, 그렇다고 독서, 영화 이런 일반적인 것을 쓰자니 성의 없어 보이고, 거창한 것을 쓰면 결국 거짓말이 되니 그것도 안 되는, 정말 무엇을 써야 할지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이 취미와 특기란 이다.
나에게 취미, 특기란? 극 I, 트리플 A, 집돌이, 정말 대외 활동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40 인생을 통틀어 남들에게 내세울 특기랑 취미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문서의 취미나 특기를 쓰는 란이 난감하고 힘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취미, 과거의 나의 이력 사항에 썼던 취미를 생각해 보면 사진, 검도, 여행, 커피 이 정도였던 것 같다. 무언가 하나를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하며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하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취미란을 넣어야 하는 그 시기에 내가 어디에 관심이 있었는지가 곧 나의 취미가 되었던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취미라는 것이 지속성도 떨어지고 전문성도 없기에 나는 항상 취미로 쓰는 단어에 자신이 없었고 그래서 나를 소개하는 글에서 썼다 지웠다를 가장 많이 하고 고민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민하고 넘어가면 다음 문항은 나에게 더 난제였다. '특기를 쓰시오', 이 항목을 접하면 항상 내가 첫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취미랑 특기랑 무슨 차이지?'이다. 두 번째로 하는 생각은 '특기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특기란 단어의 뜻을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몇 번이나 찾아봤을까? 난 40 정상을 넘어서는 이전 등산길에서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이 단어의 뜻을 처음으로 찾아봤다. '특기란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을 의미한다.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하거나 특별한 훈련을 통해 익힌 기술 등을 말할 때 사용한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특별한 훈련을 받은 기술, 내가 평생 살면서 이런 기술을 터득한 적이 있던가라는 머릿속 물음표와 함께 헛웃음이 나온다.
취미에 대한 지속성과 전문성이 떨어져 취미의 정체성도 찾지 못하는 나에게 그보다 2~3단계 더 깊은 의미의 존재인 특기는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있을 리가 없다. 나의 성향과 성격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나의 인생에 있어 매 순간 취미와 특기를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단어였던 것 같다. 40 정상을 넘는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분야 하나 전문성을 가질 정도로 진지하게 해 본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어 내 삶의 작은 후회를 가지게 만든다. 그렇게 후회하고 자책하다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나도 나름대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핑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핑계가 있다.
사진에 빠져 있던 파스텔 같은 10대 시절, 재미로 사진을 찍던 단계에서 구도를 익히고 카메라의 기능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질 때쯤 나는 입시의 전쟁에 뛰어들어야만 했고 그 전쟁에서 낙오되고 찾아온 인생의 첫 시련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더 이상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인생의 고비를 넘어 원색의 열정적인 20대에 찾아온 여행이라는 새로운 친구는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글과 사진에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가고 싶은 곳이 점점 많아지려 할 때쯤 난 취업 전선이라는 또 다른 전쟁의 포화 속에 내몰렸고, 그 전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다. 치열했지만 열정적이었던 삶을 살았던 30대 , 나에게 작은 탈출구 같았던 커피는 그 향과 깊이를 알아갈 때쯤 한 가족의 지붕으로써 가족의 생계와 육아라는 가장 고되고 외로운 전쟁터로 뛰어들어야 했다.
삶의 전쟁 속에서 잠시나마 나의 몸과 마음을 쉴 수 있게 해 줬던 피난처 같은 존재들은 언제나 그 전쟁이 치열해지고 격렬해질수록 지켜지지 못하고, 인생의 고됨과 지침에 점령당하고 파괴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피난처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나의 의지에 달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이 지치고 주변 환경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일주일에 단 반나절만이라도 투자할 수 있는 의지만 있었다면 나는 피난처이자 안식처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켜낸 나의 안식처가 나의 취미가 되어주고 더 나아가 나의 특기가 되어 지금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소개하는 글에서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자신 있게 취미와 특기 항목을 채워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지가, 나를 위한 그 투자와 시간 그 자체가 나의 취미와 특기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 같아 회피하고 싶었다. 그냥 쉬고 싶었다. 조금이 남아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에 누워 눈을 감고 쉬고 싶었다.
요즘은 취미와 특기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번뇌가 생겼다. 나의 아들의 소개서에 똑같은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나의 답을 쓸 때 보냈던 시간과 똑같은 상황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간과 상황이 반복될수록 나는 나의 아이들 또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무엇인가의 깊이가 깊어지기 전에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채 포기하지 않을까, 남들과 다른 무엇인가를 얻지 못하여 나와 같이 평생을 취미와 특기라는 단어의 벽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온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제 막 인생의 등산을 시작한 지금, 본인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시간이 많기에, 천천히 기초를 단단히 다지고 기둥 하나하나, 벽돌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삶의 전쟁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안식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 본다. 그렇게 단단해진 안식처가 그들만의 취미를 만들어 주고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본인들만의 특기가 생기게 해주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평생 무너지지 않는 튼튼하고 견고한 안식처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다가올 현실 속 온갖 풍파와 시련, 고통을 막아주는, 그 누구도 미완성된 나의 아이들의 안식처를 부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장벽이 되어주고 성벽이 되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이라도 나 또한 오랜 삶의 전쟁 속에 부서져 버린 나의 쉼터를 다시 한번 바닥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을까? 쓰러진 기둥 하나하나, 벽돌 하나하나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나에게도 취미와 특기란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의지가 남아 있을까?